어디서는 매화가 벙그러진다던데, 우리 동네는 어제 폭설이 내렸다. 오후 늦게까지 흩날리더니 오늘은 햇빛이 찬란하다. 꿈을 꾸고 깨어난 듯 어제 소복했던 눈은 흔적도 없다.
인생의 허무도 이와 같아서 옛사람들은 일장춘몽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을까.
일찌감치 게으름을 털고 일어나 눈 풍경을 휴대폰에 담고 스타벅스에 들러 뜨거운 커피를 목으로 넘겼다. 어쩌면 올해 보는 마지막 눈일 수 있기에.
매일이 마지막일지 모르니 하루에 충실하라고 어느 선생님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범인의 게으름이 어디 현자의 깨달음과 같겠는가.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 다시 공원을 돌았다. 앞서 걸어간 이들도 뒤에 오는 이들도 사진찍기에 바빴다. 연인인듯 보이는 젊은이들 웃음 소리가 저만치서 가볍게 들려왔다. '그래, 넘쳐흐르도록 젊음을 만끽하려므나' 속으로 웅얼거리며 나는 어느 나이든 시인의
문장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입속에서 읊조렸다.
"아, 사랑도 봄눈 같아야 할 텐데요.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는 봄눈처럼 가벼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내 가슴에도 봄눈 같은 사랑에 대한 열망은 흩날리고 있었다. 쌓여서 녹지 않는 사랑은 고통이므로, 만년설 같은 그리움을 가슴에 이고 사는 것은 천형이므로. 사랑아, 오려거든 이제는 부디 봄눈 같은 무게로 내리거라.
-류근,《진지하면 반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