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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류지 Apr 06. 2024

엄마의 "괜찮아".

그래서 정말 괜찮아진 나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는 나의 실수, 아픔, 걱정을 두고 "괜찮다."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후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방황을 하지 않았던 적이 드물다. 항상 불안하고 무서웠다. 두려움의 대상은 오늘 하루, 나의 미래, 그리고 과거까지. 또 오늘 내가 하는, 그리고 해야 하는 수학 등이었다. 즉,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었다. 청소년기 때에는 그저 생각 없이 노느라 바빴어서, 그리고 대학교에서 학부생일 때에는 공부에만 전념했어서였을까, 이때까지는 딱히 큰 방황을 하지 않았던 나였다. 그래서 24살에 맞이한 인생의 첫 방황이 굉장히 낯설었고, 또 그로 인해 몸도 마음도 꽤나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대학원생으로써의 삶이란, 괜찮아지다가도 다시 방황을 하기를 반복하는 하루하루로 채워지는 것 같다. 

     작년 어느 날이었다. 이때도 나는 방황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공부에 집중도 잘 안되고 앞으로의 나날들이 막막하기만 했다. 이런 감정을 엄마에게 숨기지 못하는 아직 어린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수학 그만둬도 되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그만둔다는 것은 아닌데 그런 마음이 들면 나 이제 어떻게 해? 나 뭐 하면서 살지?" 

    나 자신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포기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이 질문에 대한 나 스스로의 답은 '그만두지 마. 너는 지금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해.'였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너무나 태연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하기 싫으면 안 해야지. 네가 돌아올 곳이 없냐~? 여기 있잖아~."

    예상치 못한 답변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 돌아갈 곳이 있구나. 언제든 그만두어도 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힘이 불끈불끈 솟았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보기 싫었던 수학책을 바로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마음먹은 것은 다 해보자!' 하는 용기가 차곡차곡 내 몸에 쌓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말을 해주는 엄마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나의 눈물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행복의 물방울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약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대학원이라는 곳에 적응도 많이 했고, 또 나는 꽤나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난 여전히 '고민이 가득한 생각'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걱정을 하는 나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가 바뀌었다고나 할까. '내가 수학을 계속할 수 있을까. 나는 3년 후, 5년 후, 그리고 10년 후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생계유지를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일까.' 등등.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을 '걱정'이라는 한 단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고민이 가득한 생각'으로 받아들인다. 이 묘한 차이가 나의 마음에는 꽤나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또다시 나를 우울과 절망의 늪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럴 때 나는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괜찮다~ 돌아올 곳은 여기 언제나 이렇게 있으니까 마음 편하게 하셔~." 

    그리고 나는 또 괜찮아진다. 엄마가 나의 엄마라서 참 감사하다. 




    대학원에서 1년을 보낸 후인 재작년 여름이었다. 나는 '논문자격시험'이라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보통 수학과 대학원에서의 과정은 다른 과와 사뭇 다르다. 특히, 지도 교수님과 연구실을 미리 정하고 대학원에 입학을 하는 다른 많은 과들과는 달리 수학과는 입학이 우선이다. 추후에 교수님과의 컨택을 통해서 세부전공을 결정하게 된다. 또한, 석사과정을 거쳐서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서는 첫 관문으로 논문자격시험 중에 내가 앞두었던 이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이 시험을 통과해야 받아주시는 교수님들도 많으셨기에 '퀄'이라 불리는 이 필기시험은 수학과 대학원 신입생들에게는 눈앞에 닥친 제일 큰 미션이자 마음의 짐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그 규칙이 다소 달라진 것으로 알지만, 나 때에는 기회가 딱 3번만이 주어졌었다. 즉, 3번 만에 통과를 하지 못하면 이 학교에서는 박사과정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무서운 제약을 알고 있는 이상, 나는 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수학, 해석학, 그리고 기하학 이 세 개의 무시무시한 과목을 하루에 하나씩, 3시간 동안, 3일 연속으로 치러야 하는 숨 막히는 시험 일정, 각각의 과목에서 너무나도 방대한 시험 범위, 나에게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기출문제들, 그리고 무엇보다 집중을 하지 못하는 나. 그렇게 시험 전날까지 나는 수학이 주는 스트레스보다 스스로가 만든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힘들어하며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그리고 시험 전날, 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행정실 선생님께 시험 신청을 취소한다는 연락을 드렸고, 1번의 기회를 날리지 않고 마치 그것이 보물인 듯 다시 꽁꽁 싸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기게 되었다. 

    엄마에게는 이 사실을 바로 말하지 못했었다. 포기를 한 나에게 실망할까 봐, 서울에서 공부하겠다고 올라가 놓고 시험에 도전조차 하지 않는 바보 같은 딸인 것 같아서. 그렇게 나는 원래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던 3일 동안 엄마에게 전화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응. 금방 시험 끝나고 집 가고 있어. 이제 빨리 가서 내일 시험 준비해야지.." 

그리고 바쁜 척,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날들 동안 나는 혼자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뚜벅이 여행을 했다. 이태원에서 혼자 케이크를 먹고 한남동의 리움 미술관에 가기도 하고, 또 친구와 근처 연습실을 빌려 춤연습을 해보기도 했다. 무튼, 그렇게 3일을 비밀스럽게 보내고 그 주 주말, 나는 시험을 무사히 끝낸 척하며 부산에 내려갔다. 엄마는 시험을 치른다고 고생한 막내딸을 위해 한상 거하게 차려주셨다. 생선구이, 야채가 가득한 구수한 된장찌개, 손이 많이 가는 나물 반찬 등등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래서 그리워했던 것들이 식탁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열심히 시험을 친 것이 아니라 잘 놀다가 온 나는 마음 편히 먹을 수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이 버틸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더 이상 엄마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 밥을 먹다가 그냥 말해버렸다. 

    "엄마, 나 사실 시험 취소하고 안쳤어. " 

    이렇게나 풍성한 밥상 앞에서 나는 부끄러웠고 미안했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또 예상을 빗나갔다. 

    "잘했다! 원래 하기 싫을 때는 안 해야 하는 기다! 괜찮다. 다음에 마음이 생기면 하면 되는 거지~"

    순간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었기에. 반어적인 칭찬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엄마의 따뜻한 "괜찮아" 였기에. 눈물이 눈동자 뒤에 가득 고였었지만 최선을 다해 참았다. 밥상 앞에서 울면서 엄마를 당황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러고는 엄마와 나는 열심히 수다를 떨며 밥을 먹었다. 시험을 째고 어디로 뽈뽈뽈 놀러 가서 무엇을 했는지, 그동안 엄마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참아야 했던 나의 짧은 일탈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며. 그렇게 나는 또 괜찮아졌다. 본가에서 며칠을 머물며 잘 쉬고, 나는 나의 마음속을 밝은 빛으로 다시 채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당해 겨울과 작년 여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두 번의 도전을 한 끝에 나는 논문자격시험에 당당히 합격할 수 있었고, 지금은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신기하게도 난 꼭 1년에 딱 한 번씩, 심하게 아프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봄이 시작할 무렵 딱 하루에서 이틀 정도 몸이 이상해진다. 작년에도 이번 연도에도. 여느 때와 같이 내가 정성 들여 만든 한 끼를 먹고 난 후, 갑자기 구역질이 나며 나의 아픔이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거의 이틀 동안 무엇을 먹기만 하면 구토를 하는 증세를 보였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안 그래도 없는 살이 더 빠지고, 이틀이 지나 흰 죽을 처음 소화하며 회복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렇게 아플 때 나는 덜컥 겁이 난다. '나 이렇게 계속 아프면 어쩌지. 먹는 것을 그리도 좋아하는 나인데.. 앞으로 못 먹으면 어쩌지. 나도 활기차게 멋지게 잘 살고 싶은데.. 건강 때문에 앞으로 그러지 못하게 된다면 어쩌지.' 이런저런 걱정이 든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내가 아프다는 것을 말하면 멀리서 무척이나 걱정하실 것을 알지만, 어린 나는 바로 전화를 건다. 

    "엄마.. 나 지금 자꾸 토가 나와.. 어쩌지. 무섭다..."

     저체중인 나의 식습관에 대해 항상 걱정하시고, 가끔은 더 다양하게 많이 먹으라는 잔소리를 하시는 엄마였기에 조금의 핀잔을 들을 것을 예상하고 말을 했다. 하지만, 엄마의 첫마디는 또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괜찮다. 그럴 수 있다. 가끔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면 그럴 수도 있는 기다. 내도 가끔 그럴 때 있더라." 

    이 말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그 어떤 약보다도 효과가 좋은 약이었다. 그렇게 멀리서도 '엄마 손은 약손'이 되어주는 그런 우리 엄마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스스로에게 '그래 괜찮아. 그럴 수 있는 거야. 나 그동안 스트레스가 많았구나. 몸이 조금 쉬어 달라고 말하는 것이구나'라고 말하며 조금씩 괜찮아진다. 

    작년에도 이번 연도에도, 이 아픔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나의 식습관이나 음식을 향한 마음가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엄마가 배 아파서 건강히 나아주고, 또 20년 평생 좋은 것들로만 채워준 나의 소중한 몸이니까, 이제는 나의 몸을 혹사시키지 말고 더 소중히 여기고 아껴주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괜찮아졌다. 그리고 요즘은 내 몸과 마음이 진실로 건강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엄마. 내가 괜찮아질 수 있게 "괜찮다"라고 따스히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이제는 나의 걱정이나 아픔으로 엄마가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저 함께 웃을 수 있는 나날들이 더 많아지기를.
 그렇게 나랑 오래오래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가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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