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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이야기

by 신화창조

1960년대는 라디오는 귀중품이었다. 60년대 초반, 라디오도 없는 집이 많았다.


있다고 해봤자 커다란 진공관 라디오가 대부분이었다.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대부분 건전지를 넣어 사용했고,

전파 상태도 좋지 않아 대도시에서나 끊김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농촌 지역의 형편은 더욱 좋지 않아 전체 마을에 몇 개 정도 있을 뿐이었다.


우리 가족은 1964년 봉화에서 대구로 이사를 왔다.


우리 집 첫 라디오는 두꺼운 책 한 권 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

당시 나는 너무 어려서 좋은지 어떤지도 몰랐는데,

아버지께서 어깨를 으쓱하시며 자랑하시던 게 기억에 남는다.

갓 서른이 되신 어머니도 좋아하셨던 것 같았다.


“애들아! 이게 트랜지스터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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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좋아하시니까 우리도 좋았다.

그때는 동생들이 생기기 전이니까

아직 학교에 가지 않던 누이와 나도 아버지를 따라 어깨를 으쓱했다.


‘라디오 있는 우리 집은 부자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온종일 라디오를 켜두셨다.

라디오 연속극을 듣고, 음악 방송을 듣고 노래를 따라 부르셨다.

기쁠 때, 슬플 때, 속이 상하실 때, 언제나 라디오와 함께하셨다.


나는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가 너무 슬퍼서 싫었다.

그이의 노래를 들으실 때 어머니는 늘 슬퍼 보였다.

삶이 너무 힘들어 어머니가 어디로 떠나시면 어쩌나 늘 근심했다.

지금 들어도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는 슬프다.


어머니는 라디오 연속극을 좋아하셨다.

몇몇 연속극은 일곱 살, 네 살 먹은 누이와 나도 이해할 수 있어서 같이 듣곤 했다.


아버지께서 출근하신 직후 오전 시간,

어머니 무릎을 베고 함께 연속극을 듣는 시간이 제일 행복했다.

연속극은 노래처럼 슬프지 않아서 더 좋았던 것 같다.


가끔 우리가 이해를 못 해 뭔가를 질문할 때, 애써 설명해 주시던 어머니,

무척 행복해 보이셨다.

어머니가 행복하면 우리도 행복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라디오와의 추억.

그것은 대부분 어머니에 관한 기억이다.


그 시절 라디오를 들으시던 어머니는 이제 아흔이 되셨다.

라디오만으로도 100% 행복했던 그 시절, 젊은 어머니의 무릎 베개가 그립다.

어머니와 그 시절 라디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제는 당신의 따듯한 무릎을 내게 빌려주실 수는 없겠지?


조만간 어머니 뵈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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