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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허접 배구 선수 시절

by 신화창조
어린이 배구1.jpg

1972년, 전국 소년 체전이 생겼다.

53년 전, 5학년 때 일이다.

국가와 국민이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어서

예산 등의 지원은 전혀 없었고

나라에서 의무적으로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가 참가하게 한

국가사업이었다.


당연히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체전에 참가하기 위해 많은 운동부가 만들어졌다.

축구, 배구, 농구, 배드민턴, 탁구, 육상 등등.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기는 일이다.

예산도 예산이지만 전문 코치도 없이

일반 선생님들이 각 종목 코치를 담당하는 등

운동부이랄 수가 없이 그냥 만들기만 했다.


그러나 모든 학교의 형편이 비슷했고

학교간의 약간의 경쟁심과 아이들의 호기심이

원동력이 되어 붐 같은 게 조성이 되기는 했다.


사실 난 운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큰 관심이 없었다.

‘아~ 그런가보다’ 하기만 했다.

다만 또래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권유 아닌 권유는 늘 따라붙었다.


그런데 참가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생겼다.


“선수 돕기”


고육지책이었겠지만

선수로 참가하지 않는 애들은 일주일에 하나씩

선수를 위한 뭔가를 학교에 내야했다.


돈, 계란, 쌀, 간식용 과자,


이런 것들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다들 가난하던 시절이라, 여간 번거롭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매주 이런 것들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형편이 넉넉한 애가 계란을 두 개 가져오면

애걸복걸해서 하나를 얻기도 했고

쌀 한 봉지를 둘로 나누기도 했다.

이럴 바에는 운동부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부는 선수돕기를 면제받고,

심지어 '폼나게' 얻어먹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들어간 운동부가 배구부였다.

사실 축구를 좋아하고 축구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당시 축구의 인기는 하늘을 찔러

난다 긴다 하는 애들이 너무 많았고

망설이는 사이에 오디션도 끝나 있었다.

심지어 축구부는 2군까지 운영할 정도였다.


거기에 비해 배구부는

선수부족에 허덕이고 있어서 대환영이었다.

문제는, 흥미도 없고 배구가 뭔지도 몰랐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정말 재미가 없었다.

좋았던 것은 더 이상 선수 돕기 안 가져와도 된다는 것.

(이건 정말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나 재미가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얼마나 호기심 천국의 나이인가.

재미없는 일을 의지로 매달릴 나이이던가.


유니폼을 지급받고 몇 번 나가다가 계속 도망만 다녔다.

그러다 붙들려 끌려가 혼나고 또 도망가고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도망 다니는 일에 재미를 붙여서 스릴까지 느꼈을 정도였다.

연습을 안 하니까 실력도 안 늘고

점점 흥미를 잃고 그러니까 더 안 가고를 반복했다.


그래도 잘리지 않고 지역 예선에까지 참가했고

옆 학교 키 큰 녀석들을 이기고

1회전쯤은 통과했었다던가, 아무튼 그랬다.


그 이후,

6학년 때까지 배구를 했다는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아마도 탈퇴를 허락받고 잘 빠져 나온 듯하다.


조용히, 잘.


매일 가야하는 배구부에 한 달에 한 번

겨우 잡혀만 다녔던 배구부였지만

공을 만지고 놀던 재미도 있었던 것 같다.

나 같은 뺀질이 도망쟁이를 크게 혼내지 않았던 선생님,

착실히 내 공백을 메웠을 친구들.


이런 자랑할 것 없는 어설픈 기억도

아름답고 반짝이는 나의 유년시절의 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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