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90년대 당시, 수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른바 팻에 대한 문화가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다. 요즘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제약 회사 안에서도 심심찮게 수의사가 눈에 띄었다.
내 첫 번째 팀장도, 두 번째 팀장도 수의사였다.
심지어 첫 팀장은 서울대를 나온 분이었다.
수의사라고 해서 아무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
요즘 같으면 수의사가 영업한다면 큰 주목을 받았을 텐데 말이다.
안양 시절, 새로 들어온 두 번째 후배는 서울의 이름난 대학 출신 수의사였다.
어떻게 된 셈인지 그도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때 나는 벌써 입사 3년 차 주임이었는데 말이다. 뭘 그렇게 꾸물대다가...
이러니 내가 팔자타령을 할 수밖에.
K 군.
어머니 혼자 키운 외아들답게 모든 게 어리바리했다.
키도 크고 인물도 잘생겼는데 서른이 훨씬 넘도록 장가도 안 가고 뭐 하느라 그제야 취업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량한 친구였다.
수의사답게 의학 상식도 풍부하고 말도 잘했다.
며칠 현장에 보내보니 보고서도 엄청 많이 쓴다. 거의 다른 사람의 3배다.
일 잘하겠다는 팍 느낌이 왔다.
어느 한군데서 펑크가 나면 나머지가 메꿔야 하는 영업부 특성상 일 잘하는 후배는 늘 반갑다.
기대 만빵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 문제가 있었다.
보고하는 내용을 보면 엄청나게 높은 실적을 할 것 같았는데 꼭 마감 순간에 반 토막을 내서 모두를 실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건 거의 월례 행사로. 매달 팀장님을 미치게 했다.
마감날 늘 이 친구 때문에 분위기가 나빠지고 그걸 메꾸느라 선배들이 허둥댔다.
그렇다고 그 친구 실적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신입으로서 그 정도면 그저 그런 수준은 되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뻥튀기 보고라는 것이다. 갑자기 반 토막 내어버리니.
안 먹어도 될 욕을 먹는 거지.
찬찬히 심문(?)을 해보니 고의성은 없는데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게 문제였다.
“원장님, 꼭 해 주신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갑자기 배신을 하셨습니다. 미안하답니다. 흑흑”
“아이고...”
고객이 하는 말을 100% 다 믿어 버린다.
그대로 보고를 하고 우린 그대로 믿고 반영하고.
제대로 판단해서 보고만 했더라면 혼날 일이 아닌데 매달 혼이 난다.
팀장, 지점당, 심지어 주임, 대리에게도 깨진다.
실컷 혼나고 하는 수 없이 내가 따로 데리고 나가 위로해 주곤 했는데 모나지 않은 성격으로 별로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 친구 변호해 주느라고 동기랑 싸움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새롭다. 감싼다고....
그 친구가 어렵게 결혼하던 날, 사회도 봐줬다.
봐 주기로 했던 사회자가 안 와서 내가 또 땜빵으로, 하객으로 갔다가 갑자기.
‘아이고... 하여간 빵꾸왕이다. 장가 가는 날까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연락이 안 된다. 동물 병원 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