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병원에 전근 오자마자 본의 아니게 겪었던 갈등은 어렵게 봉합되었다.
모르긴 해도 분명 K 회장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후 본부장의 노골적인 갑질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영업은 필드와의 경쟁이 전부인데 내부 갈등 때문에 전력 낭비가 심했다. 그런 의미에서 새 본부장의 리더십은 실패했다고 본다. 전쟁 지휘부가 나가 싸울 현장 요원의 힘을 빼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 버린 것이다. 갖고 있는 전력이 약할수록 현장에 힘을 몰아 써야 한다.
대학병원 둘을 배당 받았다. 강남에 있는 C 대학병원, 용산에 있는 CH 대학병원.
또 전임자가 없다. 품목이 하나도 없는 병원 하나, 미결만 있는 병원 하나. 기가 막혔지만 그런 것에 마음 쓸 게제가 아니었다. 본부장의 의도가 어쨌든 간에 보란 듯이 해내야 했다.
밀림 속 가르시아 장군에게 편지를 전해야 하는 로완 중위의 심정이 그 시절 바로 내 심정이었다.
새 품목을 심어야 했다. 뭐가 있어야 영업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1년에 한두 번 있는 약사심의위원회를 통과해야 겨우 구체적인 매출 활동을 할 수 있는데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려면 교수님께 제품 추천을 받아야 했다. 그것도 힘 있는 유력자에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나 같은 천둥벌거숭이에게 관심을 가질까.
게다가 교수님을 원장님이라고 부를 만큼 입조차 적응되어 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팸플릿을 들고 온 병원을 헤맸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명함을 받자마자 가다렸다는 듯 추천서에 도장을 찍어주는 교수님은 아무도 없었다.
궁지에 몰리면 수가 나온다고 한 가지 궁리를 해냈다.
‘명함을 주지말자. 어차피 교수님들은 많은 사람을 만난다. 다 기억도 못할 것이다. 무조건 아는 척 하자. 여러 번 만난 척 하자.’
바쁘게 복도를 지나가는 가운 입은 머리 하얀 교수님께 인사를 했다.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물론 처음 보는 분이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 그래, 오랜만이야!”
‘응??’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 자주 못 뵈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응,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이야?”
“어쩌고저쩌고 도장...”
“응, 뭔 약이지?”
“방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이따가 보자.”
결론, 도장 받았다!
억지스러웠지만 첫 관문은 통과했다.
수많은 모욕과 무시, 이상한 놈 취급 끝에 겨우 받은 추천서였다.
보무도 당당하게 병원 약제 과에 접수시키고 바람처럼 회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