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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Mar 07. 2021

거인의 배꼽을 닮은 남편의 밥솥

이상하게 밥맛이 떨어진다.......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남편이 내게 밥을 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기서 밥은 쌀을 씻어 솥에 안쳐서 뜨거운 김이 폴폴 나는 상태를 말한다. 라면을 끓여주거나 냉동만두, 냉동 볶음밥 등으로 나의 끼니를 해결해 준 적은 몇 번 있었다. 그것도 한 1-2년 정도 된 것 같다. 그전에는 안 했다. 아니 내가 못하게 했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신혼 초 설거지를 하겠다던 남편은 첫 번째 그릇을 씻던 중 박살을 냈다. 조짐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뭔가를 더 시키다가는 다 깨 먹을 것 같았다. 주방에 들이면 안 될 듯해서 못 오게 했더니 습관이 되어버린 남편은 20년 가까이 아예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그릇을 깬 것은 굉장히 지능적으로 계산된 행동이었던 듯도 싶다. 법률 용어로 미필적 고의라고 한다. 어떤 결과가 예상될지를 미리 예견하고 일부러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릇을 깨버리면 두 번 다시 설거지를 시키지 않겠지?'


남편은 그렇게 생각했을까? 설마 그렇게까지 교묘한 사람과 내가 살고 있었던 걸까?


2년 전부터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원고 쓰기를 하는 등 나의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나는 남편에게 장 보기를 떠넘겼다. 대형 마트에서 돌아다니며 장을 보고 온 날은 너무 힘들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는 거의 90세 어르신 수준의 체력을 지닌 듯...)


장 보기를 대신해주는 남편은 이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기세를 몰아 요새는 저녁을 차릴 때 반찬을 덜어 놓으라거나 숟가락을 좀 챙기라는 얘기도 한다. 그러면 옆에 와서 시키는 대로 한다. 싫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뭔가를 자발적으로 할 줄 모른다는 거다.


얼마 전까지 남편은 10년 가까이 쓰고 있는 압력 밥솥 뚜껑 여는 법을 모르고 있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가르쳐 주었는데 압력을 풀기 위해 손잡이 버튼을 지긋이 밀어 올려서 뚜껑을 여는 과정이 복잡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남편은 번번이 잊어버렸고 아니나 다를까 밥솥 뚜껑을 열지 못했다. 기가 막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흥분해서 따졌더니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요새 누가 압력밥솥을 쓰냐고. 편하게 전기밥솥을 사라고. 당신은 이쯤에서는 조금 더 편하게 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예전에 사용하던 전기밥솥이 고장 나 버린 후에는 굳이 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3년째 새 물건을 안 사며 미니멀하게 지내려 노력하고 있는데 고장 나지도 않은 압력밥솥을 내다 버리고 전기밥솥을 살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전기밥솥은 전기 잡아먹는 귀신이기도 하다. 대신 우리 집 압력 밥솥은 성능이 무척 좋아서 단 5분이면 밥 짓기가 끝난다. 아주 편하게 효율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 밥솥을 바꿀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이 밥을 좀 하면 내가 저절로 더 편해진다고!!!"


그래서 압력 밥솥 뚜껑 여는 법을 남편에게 짜증 반, 분노 반을 섞어가며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 후에도 남편은 압력밥솥 뚜껑을 열 때마다 버벅댔다. 그 시간들을 거쳐 요즘엔 잘 연다.


다가올 미래, 명예퇴직을 한 남편이 해주는 밥을 먹으려면 하나 둘 훈련을 시켜야 하므로 이제는 밥공기에 밥을 좀 퍼서 담으라고도 한다. 그러면 또 아무 불평 없이 와서 밥을 담는다. 부지런히 행동을 하기에 남편이 이제는 주방 일에 척척 적응을 하려나 보다 내심 기대도 했다.


그러나 뒷날 점심때 전날 남은 찬밥을 데워 먹으려고 압력밥솥 뚜껑을 열던 나는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밥 먹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도록 만들어 놓은 희한한 솥단지 때문이었다. 



밥 먹고 싶은 생각이 달아나도록 만드는 희한한 솥단지.



밥을 풀 때 살살 섞어 한쪽에서 가지런히 쓸어 담을 줄 모르는 남편. 그는 밥솥 바닥을 뚫어버릴 기세로 중간만을 집중 공략해서 커다란 구멍을 내놓았다. 


밥솥 주변으로 튜브처럼 빙 둘러있는 하얀 쌀밥이 무색하게 밑바닥을 다 드러낸 중간을 보니 내 가슴에도 큰 구멍이 뚫린 듯 허전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밥솥 뚜껑을 닫아두었던 것이다. 쥐도 새도 그리고 사람도 모르게.


내가 왜 중간부터 밥을 펐냐고 따져 묻자, 남편은 중간부터 밥을 푸면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 않냐고 반문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사실 아무렇게나 푸면 뭐 어떤가. 밥맛의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닐 텐데.


다만 이렇게 밥솥 가운데만 파서 밥을 푸는 사람을 평생 동안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었던지라 많이 당황했을 뿐이다. 신혼 초부터 그릇을 깬 그는 교묘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뭘 많이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해하고 사는 게 서로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테니까.


어쨌든 밑바닥이 드러난 밥솥을 보던 순간, 갑자기 거인의 배꼽이 생각났다. 동화적 상상력도 솟구쳤다. 거인이 남의 집에 숨어 들어와서 밥솥을 끌어안고 주걱으로 밥을 마구 퍼먹는 장면도 그려졌다.

그러나

동화가 아닌 현실에서는 거인의 배꼽을 보고 밥맛이 생길 리가 없잖은가.


점심때 나는 하는 수 없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      




** 남편이 나를 도와 어떤 집안일을 하는지 손꼽아 보았다. 장을 보고 주말에는 청소기도 돌린다. 빨래를 개켜 주기도 하며 때론 설거지를 한다. 주말 점심에는 라면도 끓이고 감바스도 해준다. 생각보다 남편은 나를 많이 돕고 있었다.


이제 압력 밥솥에 밥하고 요리 한 가지만 하면 된다. 제대로 밥을 푸지 못하는 것쯤이야 사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이상하게 밥맛이 떨어지긴 해도 아주 못 먹을 맛은 아니니까... 밥은 막 퍼도 대신 반찬을 잘할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남편을 믿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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