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하LeeHa Nov 22. 2019

훌쩍거림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말길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친구와의 사이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친구들 간에 이리저리 말이 옮겨지면서 친한 친구와 오해가 생겨버린 것이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해서 나를 오해한 친구와는 절교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친하면서도 그깟 이간질에 뒤돌아서버릴 정도의 친구라면 차라리 친구 사이가 아닌 게 낫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관계를 끝내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학교를 다니면서도 엄마나 언니들에게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언니들과 오빠를 둔 막내여서 눈치가 빨랐다. 내가 힘든 티를 내면 엄마가 걱정한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알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들은 어지간하면 표현하지 않고 넘겼다.


혼자서만 나쁜 기분을 끙끙 감추고 있던 그 무렵 엉겁결에 아버지를 따라 밖에 나갔다. 마침 점심때가 되었는데 아버지는 여러 번 가본 맛집이라며 나를 칼국수집으로 데리고 갔다. 국수 종류를 다 즐겼던 아버지는 특히나 푹 퍼진 칼국수를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칼국수를 먹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내키지 않았다. 엄마가 손으로 뜯어서 끓여주는 수제비나 동네 국수 공장에서 파는 소면으로 만든 잔치국수만 좋아했기 때문이다.


잠시 뒤, 뜨거운 칼국수가 커다란 항아리에 담겨 나왔다.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워낙 좋아하니 하는 수 없이 칼국수 한 젓가락을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 한 젓가락 칼국수의 맛은 상상 이상이었다. 코가 빠질 정도로 항아리를 내 앞에 당겨다 놓고 국물 한 방울까지 싹싹 긁어가며 칼국수를 먹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런 내가 기특해 보였던 것 같다. 부모는 음식을 야무지게 잘 먹는 자식 모습만 봐도 그저 기분 좋다는 것을 나도 아이를 낳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배부르게 칼국수를 먹고 아버지와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가 옆자리에 탄 나의 손을 우연히 보고는 갑자기 껄껄껄 웃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해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더니 '어쩜 너는 손이 이렇게 작고 예쁘니?'라고 말하며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손 작은 아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에는 워낙 키도 작았으니 아마 손도 작았을 것이다.


그 후 사춘기를 지나 키는 훌쩍 자랐지만 손은 키만큼 자라주지 않았다. 지금도 내 손은 초등학생 아이 손처럼 작다. 묵직한 과일  하나를 한 손에 쥐기 버거울 정도로 작은데 이 손을 볼 때마다 칼국수집 주차장에서 껄껄 웃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친구와 절교하겠다는 결심으로 우울했던 나는 칼국수 한 그릇과 아버지의 웃음소리 덕분에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같은 어른이 되면 맛있는 식당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들어가 원하는 음식도 사 먹을 수 있고, 자가용을 운전해서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러웠다. 어른이 되면 친구와 절교하는 문제 따위로 속상한 일은 없을 거라 믿었다. 


훗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알았다. 내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그때의 아버지는 굉장히 막막한 상태였다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는 당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도 당했지만, 아버지가 망했다는 소식에 주변 지인들의 외면도 감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빌려서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종잣돈 500만 원을 소매치기당한 사건도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사연을  우리 가족은 몰랐다. 아버지의 메모장과 일기 수첩에 기록된 내용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차마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말 못 하고 혼자 그 속상한 시간을 견뎌냈을 아버지가 너무나도 가엾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왔다.


아버지처럼 착한 사람도 형편이 어려운 자신 앞에서 돈 자랑이나 하는 친구를 더 이상 친구로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러운 세상! 난 몰라. 말 안 하고, 눈 안 보고, 귀 안 듣고'라고 써놓은 글과 그림을 보니 아버지의 그때 심경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화날 때는 입, 눈, 귀 다 막자.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칼국수 값을 내고 운전 잘하는 아버지를 보며 어른들은 누구나 뭐든 척척박사처럼 다 알아서 하니 근심 걱정 하나 없을 거라던 나의 생각은 착각 중에 착각이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도 못하는 일은 천지에 널려 있고 때마다 걱정거리가 생기며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고 싶기도 하다는 것을. 어른이 되었지만 힘들 때는 여전히 엄마, 아빠가 생각나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인다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는 슬프고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 놓는 대신에 그저 혼자 묵묵히 메모장 한 귀퉁이에 글만 적어 놓았다. 그 글들의 끝에는 과유불급,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은 것이라 써놓았다. 지나친 슬픔과 원망에 빠져 현재를 망쳐서는 안 된다는 걸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JUST DO IT! 어쨌든 해보라, I can 나도 할 수 있다.'를 쓰며 마음을 다잡았기에 막내딸과 함께 칼국수 한 그릇도 사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막내딸의 조막만 한 손을 보며 귀엽다고 칭찬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쩜, 너는 이렇게 손이 작고 예쁘니?"


 어릴 때, 아버지가 해준 이 말은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중간중간 불현듯 튀어나와 나를 토닥여주었다. 세상이 내 뜻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외롭고 지칠 때마다 내 손 잡아 주던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훌쩍거릴 일 많은 세상 속에서도 미소만큼은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나의 어여쁘고 작은 손을 들여다본다.




이전 06화 내 친구, 아맛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