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대입 수학 능력 평가가 있던 날, 볼 일 때문에 외출을 했었다. 수능 당일의 추위를 피해 서둘러 종종걸음 치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아파트 현관 입구 벽에 팔꿈치를 부딪쳤다. 한동안 팔을 접었다가 펼 때마다 저려서 불편했다. 그 불편함 때문에 오래전 아버지의 다친 손목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현재 대입 수학 능력 평가로 알려진 대학교 입학시험은 30년 전엔 학력고사로 불렸다. 시험 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추웠다. 수험생들과 수험생 가족들의 긴장감이 똘똘 뭉쳐 대기의 기운을 더 얼어붙게 만드는 거라고 당시의 어른들이 말하곤 했다. 그때도 입시한파는 대단했다. 추워서 덜덜 떨렸던 건지 두려워서 그랬던 건지 구분은 안 되었지만 시험장에 들어서면서부터 기분은 한없이 오그라들었다.
위축된 채 시험을 본 나는 낙방을 했다. 내 위의 언니들과 오빠도 나 보다 앞서 한 번씩 낙방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우리는 모두 고3 수험생일 때 자신들의 성적보다 더 좋은 대학과 학과를 원했고 실패하자마자 정해진 코스라는 듯 전부 재수를 했다.
그러나 나는 형제들보다 한 술 더 떠 삼수까지 해버렸다. 그리고 그마저도 실패를 했다. 당시에는 전기 시험에서 대학에 떨어지면 후기 시험을 또 봤고 나온 성적에 맞춰 대학교도 단 한 군데만 지원할 수 있었다. 첫 시험을 만회할 두 번째 기회가 있다는 측면에서는 좋게 볼 수도 있겠지만, 지겨운 시험을 또 치러야 한다는 점에서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4남매 중의 막내가 삼수 후에도 대학을 떨어져서 후기 시험을 앞두고 있던 기간, 집안 분위기는 초상집 같았다. 오랜 세월 수험생 4남매의 뒷바라지를 한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서 울고만 있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달래주려고 '너는 막내니까 또 한 번 도전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특별히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더 고생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당시의 나는 수험 생활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하고 끔찍해서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
폭탄 발언으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엄마와는 달리 아버지는 특별한 말이 없었다. 그저 내가 원하는 걸 하라고만 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전혀 몰랐다. 남들이 가는 대학에 가는 게 오직 내가 할 일이라며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그런 말은 나에 대한 무관심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 입시에 연거푸 낙방하는 딸을 한심하게 여길 거라는 생각에 자격지심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눈치껏 슬슬 피했다.
그해 겨울은 특히나 더 추웠는데 폭설이 자주 내렸고 내린 눈이 녹기 전에 강추위가 몰려와 빙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온 천지가 스케이트장이 된 것처럼 꽁꽁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아 식구들이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30여 년 전이니 밖에 나간 사람이 공중전화를 이용해서 집에 전화를 걸지 않는 이상, 연락이 닿을 방법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새벽녘에야 아버지가 집에 왔다. 그런데 거의 기어들어오다시피 했다. 빙판길에 넘어져서 이곳저곳이 다친 아버지는 아무래도 손목이 부러진 것 같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경황이 없던 엄마는 응급실에 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한 채 아프다고 끙끙대는 아버지를 데리고 집 근처의 접골원에 갔다.
접골원에서 이어 붙인 부러진 오른쪽 손목은 그 후 오랫동안 아버지를 괴롭혔다. 뭐든 뚝딱뚝딱 잘 만들던 아버지가 오른손에 힘을 줄 수 없으니 일상생활 중 불편한 일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나마 다행히도 아버지는 양손잡이였기에 오른손이 못하는 일을 왼손이 대신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글씨만큼은 꼭 오른손으로 써야 했다.
매일 일기를 쓰고 메모장에 기록을 하던 아버지에게 부러진 오른쪽 손목은 치명적이었다. 볼펜으로 글씨를 쓸 때마다 너무 아파했다. 우리는 아버지가 부러진 손목 때문에라도 더 이상 글씨는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새벽마다 일어나서 러닝셔츠 차림으로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신문과 책을 보며 메모하던 장면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다른 선택을 했다. 당신이 줄곧 써 오던 필기구를 교체해 버렸다. 볼펜보다 손목의 힘을 덜 필요로 하는 붓으로 바꾼 것이었다. 노트와 볼펜 무더기는 아버지의 책상에서 멀어졌고 대신 화선지와 붓이 빈자리를 메웠다. 아버지는 작은 벼루와 먹, 통에든 먹물을 사서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년간, 우리는 기다란 화선지를 펴 놓고 그 위에 붓글씨 쓰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지냈다.
30년 된 아버지의 먹물 통
30년 넘은 아버지의 먹과 벼루와 붓들.
아버지의 벼루들, 가장 작은 아기 벼루에 먹을 갈아 드린 적도 있다.
아파트 벽에 부딪혀 팔꿈치가 다쳤던 그날, 나는 욱신거리는 팔을 붙잡고 몇 줄 글을 끄적거렸다.
'손목이 부러져버린 내 아버지는 필기구도 바꿔가며 메모를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노트북 자판 정도는 두드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사실 내 마음을 더 많이 움직여서 글을 쓰도록 만들었던 건, 아버지의 손목이 부러졌던 이유 때문이었다.
시험에 낙방해 울고 있는 막내딸이 안쓰럽고 속상해서 아버지는 한잔 두 잔 술을 마셨고 결국 만취 상태로 오다가 빙판길에서 미끄러져버린 거였다. 나중에 대학에 입학을 하고 나서야 엄마를 통해 뒤늦게 이 사실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결국 아버지 손에 몇 년 동안이나 볼펜을 쥐지 못하게 한 사람은 나였던 거다. 한동안 벼루와 먹, 붓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다친 손목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그 기억은 아버지가 나를 아껴주었던 순간들에 밀려 점점 퇴색되었다. 지금 와서 내게 남은 또렷한 기억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어이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내어 붓글씨라도 쓰던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그러니 나도 ‘못한다, 안 하겠다, 할 수 없다’는 나약한 마음은 접어 버린 채 한 번 시작한 일이라면 야무지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도록 내 나름의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