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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Mar 06. 2020

아버지의 기록 때문에 울고 웃는 나날들

아버지의 메모장에는 일기 수첩과는 달리 한글도 꽤 많이 있어서 계속 뒤적여 보게 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훨씬 전부터 쓴 기록들이니 아마도 40년을 훌쩍 넘은 내용들도 있을 것이다.


보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웃음도 터졌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재미난 분이었다. 농담도 잘해서 사람 배꼽 빠지게 만드는 재주가 남달랐다.


메모장 한 귀퉁이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역시 아버지답다는 생각을 했다. 발가락으로 연필을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아버지. 아마도 직접 해보기도 했을 거다. 안 봐도 안다. 아버지는 늘 기록을 했기 때문에 볼펜과 샤프, 연필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한 녀석을 가지고 '발가락 꼼지락' 그림을 그렸을 거다.


발가락 꼼지락 그림. 발가락으로 글씨 써 봤니?



눈 얼음 밟지 않고

어느 봄이 오더이까

어두운 재 넘지 않고

어느 해 솟더이까

한 발짝 물러서 보면

크게 도는 톱니바퀴


아버지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써놓은 시는 장순하 시조시인의 시 일부이다. 당시만 해도 저작권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았을 테니 어디선가 좋은 글귀를 보고 따라 적어 놓은 것 같다. 


'내 아버지가 그 옛날에 필사를 하셨구나.....'


아버지의 마음에 쏙 든 시구가 내 마음에도 든다.  살면서 힘든 일이 많을지라도 꿋꿋하게 살아내라는 메시지를 나에게 준 것만 같다.  유언 없이 어느 날 훌쩍 떠나버렸지만 아버지가 남겨 놓은 작은 노트와 일기를 적은 수첩들이 수십여 개가 넘는다. 더 이전 기록도 있었겠지만 그건 못 찾았다. 이것만으로도 어디냐 싶다.


맥가이버 칼과 흘러간 뽕짝짝


아버지는 맥가이버 칼을 아주 좋아했다. 스위스제 맥가이버 칼이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는 쓰지 않았다. 새물건 쓰기를 아까워하던 아버지는 항상 낡고 해진 것을 고쳐서 썼다. 대신 새 물건은 이렇게 그림으로 그리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 같다. 


트롯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최애 가수는 나훈아였다. 옛날에 TV에서 가수 김창완이 나와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콩죽 먹고 배 앓는 소리를 내는 가수도 있냐?" 

(김창완 가수님 죄송합니다. 나훈아만 좋아하는 저희 아버지의 취향이 아니었어요~~)



자식 걱정하는 우산 본 적 있나요?


웬 우산 그림인가 했더니....<자식 걱정하는 부모 마음으로 만든 알뜰 상품. 신동아 늘 푸른 나무>라고 쓰여있다. 앞으로 비 오는 날 장우산을 쫙 펼쳐들 때면 아버지가 그리고 써놓은 우산대와 손잡이를 떠올리게 될 거다.


아버지가 우리 자식들을 걱정한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엄마에게 효도하고 형제자매간에 우애 있으며 우리들의 자식들까지 잘 건사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33권의 노트와 15권의 일기 수첩이 손에 들어왔다. 유언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남겨준 기록들에는 이미 우리 4남매에게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그리운 날,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한 날, 답답하고 속상한 날. 한 장씩 펼쳐 보며 아버지를 만나야겠다.




https://brunch.co.kr/@yeon0517/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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