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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Nov 08. 2020

집이 망한 날, 돌덩이가 굴러 들어왔다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변치 않는 가치를 찾다

아버지는 선생님을 했어야 했다. 국어나 지리 선생님으로는 안성맞춤인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책 읽고 전 세계 지도 보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재미있었다. 올망졸망한 자식 넷을 키우면서도 크게 야단친 적이 별로 없었다. 우리들에게 뭘 바란 적도 없었다. 뭘 못해도 잘하라고 채근한 적도 없었다.


용돈도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었다. 우리들만 준 게 아니라 일가친척들의 자식들까지, 친구들의 아들, 딸들에게까지 주었다. 중고등학교 선생님을 했다면 아마도 인기 만점 선생님이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에게도 용돈을 주고도 남았을 테니까. 아버지는 정이 많고 인심이 후했다.


이런 아버지가 사업을 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니 본인이 손해인 줄 알면서도 남의 어려움을 외면 못했다. 그 옛날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는 연대보증인이 되는 선택을 하였다. 그게 뭔지 어린 자식들은 알 리가 없었다. 연대보증을 서준 사업체는 회생불능인 상태로 부도가 났고 그 부담을 아버지가 고스란히 떠맡아야 했다. 40년 전의 일이다.


당시 우리는 옆 단지의 평수 넓은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어 있었다. 그 외에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땅과 세를 받던 가게도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들이 다 날아갔다. 우리 집에는 말로만 듣던 빨간딱지가 물건들 위에 다닥다닥 붙어버렸다.


연대보증을 서준 사업체가 최종 부도 처리되던 날. 엄마는 커다란 함을 열어서 미제 스팸을 꺼냈다. 40년 전의 미제 스팸은 동네 가게에서는 팔지 않던 것들이었고 어쩌다 한 번씩 좋은 날에만 먹던 음식이었다. 먹성 좋은 자식이 넷씩이나 되니 스팸 한 통으로는 누구 코에 붙일 수도 없었다. 엄마는 그날 아끼던 스팸을 두 통이나 따서 다 구워주었다.


그때의 엄마가 구워준 스팸에는 아마도 이런 뜻이 있었을 거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도 우린 죽지 않아. 다시 일어나서 너희들 먹이고 입히고 대학까지 전부 다 보낼 거야.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 거야.'

집이 망해버려서 슬퍼야 했는데 뜨거운 흰쌀밥 위에 바싹 구운 미제 스팸을 하나씩 올려 먹는 맛이 너무 좋아서 행복했다. 내 나이 열두 살, 큰언니 나이 열일곱 살일 때다.


돌의 자세를 잘 잡아서 균형 있게 받침대를 만들어 줘야 한다. 치밀하게 계산해서 만들지 않으면 기울어진다.


당시 아버지는 전 재산을 잃었다는 충격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다 잃은 게 아니라고 했다. 자식 넷이 건강하며 바르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간신히 건진 아파트 전셋값 정도는 있고, 1-2년 정도 버틸 생활비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시간을 갖자고 했다. 그리고 두 분은 서로의 잘못을 헤집지 않았다. 불문율처럼 그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를 원망하지 않았다. 사소한 다른 일로는 싸울지언정 재산을 잃은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할퀴는 법이 없었다. 적어도 열두 살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 후 엄마와 아버지는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아버지가 쌓아오신 모든 것이 사라진 데에서 오는 울분과 우울, 실망과 좌절은 집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차를 타고 당일 코스 또는 1박 2일 코스로 돌아다녔다. 당시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후에 재기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늘 엄마가 아버지와 함께 먼 길을 따라나서 주었다.


가로 6X 세로 6= 36칸 안에 전부 다 모양 다른 녀석들이 들어앉아 있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어느 날. 개울가에서 돌 한두 개를 주웠는데 그게 바로 아버지가 수석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이야 어디에 가서 함부로 돌을 가지고 올 수 없지만 40년 전만 해도 댐 건설 시 수몰지구도 있어서 버려지는 돌을 모을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귀여운 모양의 돌 한두 개를 주웠는데 줍다 보니 아버지에게도 돌을 보는 생겼다.


게다가 손재주가 좋은 아버지는 그 돌에게도 딱 맞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귀여운 녀석들을 그냥 바닥에 굴리며 천대하는 것은 아버지의 성정과는 맞지 않았다. 돌을 주워오면 깨끗이 씻어서 햇볕에 말리고 영양크림을 잘 발라주었다. 엄마는 이때부터 영양크림을 돌에 양보하셔서 평생 안 바르고 산다.


그리고 나무를 사다가 받침대를 도안해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집 거실에는 작은 목공소가 생겨버렸다. 톱과 연장, 받침대를 칠할 페인트와 붓들이 넘쳐났다. 돌 받침대(좌대)를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 아버지는 각종 조각칼을 전부 구비했다.


그렇게 돌과 함께 긴긴 아픔의 시간을 삭이며 떠나보냈다. 점점 웃는 날이 많아졌고 몇 년이 지나 아버지는 다시 조그맣게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색칠 못한 나무 빛깔 그대로의 받침대들/ 달빛 아래 전선줄에 앉아 있는 제비 모양 돌.


우리 집에 있는 수백 개의 돌에는 무수한 사연이 있다. 사업이 망해버린 절망감을 안고 마음을 달래려 전국을 떠돌던 엄마와 아버지. 그 두 사람이 머릿속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선택한 것은 남에 대한 원망이나 복수가 아니었다. 뼈아픈 실수지만 자꾸 되새기고 헤집기보다는 잊고 지나가기를, 치유되기를 선택한 내 부모님의 이야기가 돌 하나하나에 얹혀 있다.


동그란 돌도 있지만 삐죽거리는 돌도 있다. 덩치도 큰 놈, 작은놈 제각각이다. 인생을 닮았다



그 때 집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는 수백 개의 돌도 없었을 것이다. 돌 하나하나에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합심하여 잘 살아보려는 아버지와 엄마의 의지가 담겨 있다. 자식들에 대한 무한 애정과 함께 반드시 잘 키워보겠다는 희망도 서려있다. 우리 가족만의 스토리가 새겨져 있다.


세상에는 돈 보다 더한, 변치 않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 집의 수많은 돌들이 알려준다. 아버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 돌들에게 무한 사랑을 쏟았다.


엄마 물개와 아기 물개. 아버지는 이런 앙증맞은 걸 좋아했다. 귀엽다고 껄껄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애정 하던 대상들을 떠올려 본다. 수십 년 된 일기 수첩들, 수십 권의 기록 노트, 수십 권의 지도책, 수백 장의 붓글씨 해놓은 화선지 그리고 수백 개의 돌들과 직접 만든 받침대들..... 아버지는 진정한 덕후의 모습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무엇이 그리 급해서 일찍 떠났는지 너무나도 속상하지만 짧은 시간 열정적으로 살다 간 아버지가 남긴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오늘도 못다 한 이야기꽃을 피운다. 울다 웃다 울다 또 웃는다.


떠난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수석을 모아놓은 장식장 옆에, 우리 아버지가 늘 서있는 것만 같다.


아기 쌍둥이처럼 닮았다며 서로 떼어놓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받침대를 만드셨다. 우리 아버지답다^^ 숨은 돌 찾기~~



https://brunch.co.kr/@yeon0517/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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