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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Aug 23. 2020

22년 만에 아버지의 일기장이 내게로 왔다.

매일 쓰신 일기가 곧 유언이었다.


아버지는 98년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지 못해서 아버지가 쓰던 일기장, 노트, 화선지 위의 붓글씨, 수집해 놓았던 수석 등등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이사를 갈 때도 다 들고 다녔다.


곧 있을 친정집 리모델링을 위해서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의 유품들이 다시 나왔다. 나는 엄마와 언니에게 아버지의 일기장은 내가 보관하고 싶다고 말했다. 친정에 있던 아버지의 유품들 중 일부가 22년 만에 나에게로 왔다. 그것들을 펼쳐 보는 내내 여러 가지 감정들이 생겨났다가 잦아들었다.


아버지는 워낙에 메모광이며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이 많아서 배우기를 좋아했던 분이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다 기록했고 그런 일이 쌓여서 그런지 놀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우리는 다 잊어버린 것도 아버지는 전부 기억했다. 그게 다 기록의 힘이었던 것 같다.


1989년 아버지의 한 줄 일기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매일매일 쓴 한 줄 일기가 전부 한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거다. 한자를 잘 모르는 나는 아버지의 일기장 해석이 불가능하다. 자유자재로 한자를 읽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정확한 내용을 알기는 어려울 듯하다. 언니. 오빠의 도움을 받아서 이해되는 부분들만 조금씩 살펴볼까 한다.


아버지는 하루 한 줄 일기를 빠짐없이 썼고 날짜 앞에 자신만이 아는  표시도 해놓았다. 중간중간 형광펜 사용의 흔적도 보였다. 간혹 가다가 쓰여 있는 한글로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아버지는 누구나 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는 게 많아서 들려줄 이야기도 많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가끔씩 잘난 체가 심하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금세 삐졌다. 아버지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잘 토라진다는 거였다. 그래도 마음이 여려서 금세 풀어지곤 했다.


아버지는 성격이 급해서 뭐든 빨리 해야 하고 확실히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솔선수범의 달인이었고 새벽 기상의 끝판왕이었다. 아버지는 요즘 유행하는 자기 계발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서 날마다 몇 시간씩 공부하고 기록하는 걸 즐기던 중년의 아저씨. 지금 생각해 봐도 아버지는 순진하고 맑았다. 어른이지만 때 묻지 않았고 순수했다.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명필이었고 그림도 곧잘 그렸다. 노래며 운동이며 못하는 게 없었다. 요리 솜씨도 좋았다. 그러나 술과 사람을 너무 좋아했고 패션 센스가 부족했다. 세련됨을 추구하는 엄마가 날마다 뭐라고 했지만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작년 3월부터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블로그에 기록하며 얼마나 재미있게 지내셨을까....'

지적 호기심이 많고 탐구 정신이 강한 노인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불쑥불쑥 났다. 그래서 노인분들 블로그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혼자 훌쩍인 날도 있다.




98년 어느 날. 누구보다도 건강하던 아버지는 아침 일찍 동창 모임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고였다.


22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올 것만 같다. 그렇게 아버지의 모습은 생생하다. 아버지는 여전한데 그 사이 엄마와 나와 내 형제들만 늙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기억 속의 아버지가 정정하니까.


나에게로 온 아버지의 메모장과 일기 수첩들.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수첩에 빼곡하게 기록된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사이 아버지 생각이 너무 많이 날까 봐 일부러 피했던 아버지의 일기 수첩과 노트들이다. 우리 아버지가 자식 넷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싶었던 건지 이제는 살펴봐야겠다. 


아버지의 한 줄 일기가 가득한 수첩들
글과 그림으로 빼곡한 노트 33권 그리고 백지로 남겨놓은 34번째 노트



https://brunch.co.kr/@yeon0517/171


https://brunch.co.kr/@yeon0517/149


https://brunch.co.kr/@yeon0517/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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