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일기 수첩과 노트가 내 손에 들어온 지 2주쯤 지났다. 거의 3-40년을 전후한 것들이어서 수첩을 펼칠 때도 노트를 펼칠 때도 조심하게 된다. 삮은 부분이 있어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많았다. 뭐든 배우기를 즐겼고 눈썰미가 좋아서 한 번 본 건 그대로 따라 했다. 아버지의 취미 중 하나는 전 세계 지도 그리기 및 국내 지도 그리기였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지구본을 이리저리 돌리고 세계지도책을 펼쳐 놓고 흥미진진해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이곳저곳 여행 다니기도 좋아했던 아버지는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자마자 세계 여행을 떠났고 가는 곳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타자기 앞에 앉아 비매품 여행기를 썼다.
함께 여행 갔던 일행(전부 중년 아저씨들) 중 어느 누구도 읽고 싶어 하지 않고 별 관심도 갖지 않는 여행기를 정성 들여 썼다. 그 후 복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일일이 나눠주었다. 아버지의 여행기를 끝까지 읽은 사람은 일행 중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응이 없었어도 아버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본인이 정말 좋아해서 혼자 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수첩을 살피던 중 1981년도에 대륙별로 나라와 수도를 정리해 놓은 페이지들을 발견했다.
아시아 대륙의 각 나라와 수도
아버지는 새로운 지도책이 나오면 금세 사 와서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또 봤다. 그래서 전 세계 지도와 나라들을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다 외워버렸다. 각 나라와 그 나라들의 수도 이름을 아는 것은 기본이고 그 나라들의 주요 도시도 다 알고 있어서 꼭지를 돌리면 흐르는 수돗물 마냥 줄줄 읊어 주었다.
유럽 대륙의 나라와 수도
어릴 때 아버지가 다른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흘려 들었다. 가본 적도 없는 나라, 발음도 생소한 나라를 내가 왜 알아야 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그런데 작은 언니는 아버지 옆에서 귀동냥을 해서인지 중고등학교 때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역사, 지리, 세계사를 늘 거의 다 맞아왔다. 물론 나는 항상 많이 틀렸다.
수첩을 살펴보다가 각 나라와 그 밑에 수도를 쓴 것은 이해가 되었는데 그 옆의 숫자는 무얼까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니 인구수인 것 같았다.
'아버지. 진짜.... 도대체 남의 나라 인구수까지 왜 궁금하셨어요???'
나는 그게 더 궁금했다.
근데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내게 이렇게 말한다.
"그 옛날에 인터넷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다 찾아내신 거지?"
그렇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3초면 나올 것들이지만, 40여 년 전이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불편한 방법으로 찾아야 했을 거다.남의 나라 인구 숫자가 왜 궁금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찾아서 일일이 기록해 둔 아버지. 아마도 전 세계의 나라와 수도를 언젠가는 샅샅이 방문해 보겠다는 꿈을 지녔던 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아메리가 대륙의 나라와 수도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와 수도
아버지 노트의 중간중간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기도 한데. 어떤 때는 이런 식으로 외곽 순환 고속도로 개통 계획표까지 그려 놓은 것도 있다. 각 구간별 거리도 친절하게 써 놓았다. 누가 보면 외곽 순환 고속도로 사업 관계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1997년 2월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개통 계획
아버지의 노트를 보면서 누구나 다 자신만의 관심 분야가 있기 마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들여다보기만 해도 하품이 나오는 지도와 지역명 등등을 재미 삼아 살펴보았던 아버지. 내 아버지는 이런 것들에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던 게 분명하다.
그 옛날 내비게이션은 없었지만 아버지는 운전을 아주 잘했고 길을 찾는 데는 선수였다. 어릴 때 우리 4남매를 태우고 놀러 다녔던 아버지는 한 번도 길을 잃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출발 전에 늘 목적지까지 가는 지도책을 펼쳐서 꼼꼼하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길이 막히면 저 길로, 저 길도 막히면 또 다른 길로. 아버지는 길을 귀신처럼 잘 찾아 달려 주었다.
아버지가 지도책을 그리 사랑했던 이유는 뭘까?복잡한 길 위에서 헤매지 않도록, 우리 자식들이 길 잃는 일 없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주려고 그랬던 것은 아닐까? 혹시나 길을 잃었다면 살피고 배움으로써 또다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던 게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일기 수첩과 노트를 만지며 생각해 본다. 가끔씩 길 잃는다고 해도 두려울 건 없다. 인생길에서도 지도책을 펼쳐 들고 수많은 갈래길을 살펴보면 된다. 가다 보면 길은 어디에든 있기 마련이니까. 내가 찾은 그 길, 내 마음에 드는 그 길로 가면 된다.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돌아 나와 다른 길로 가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길은 많다. 없으면 새로 만들어서라도 갈 수 있다. 그게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