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일곱 살 무렵,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아이는 혼자서도 잘 놀고 있었다. 방문을 닫아준 채 나는 거실과 주방 사이를 서성였다. 그즈음 억울한 일이 있어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는데 그런 모습을 딸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는데 마침 나를 억울한 감정에 휩싸이게 만든 사람에게서 문제의 전화가 왔다. 통화를 끝마치고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순간 식탁 유리에 금이 갔다. 딱 중간 지점이었고 그 금으로 인해 식탁 유리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무거운 물건을 세게 내려놓아도 끄떡없던 튼튼한 식탁 유리였다. 그랬던 유리가 갑자기 내 주먹 아래에서 반쪽으로 잘라져 버린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억울하고 화나던 감정도 달아나버렸고 깨진 유리를 보며 놀랐던 기억밖에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화를 낼 만한 일도 아니었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은 나 역시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 거였는데 그때는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 그때를 떠올려 봐도 나를 화나게 한 사람보다 그 사람 때문에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는 점만이 기억난다. 감정 조절을 못한 나는 무참한 결과 앞에서 한참 동안 반성해야 했다.
아버지의 일기 수첩에서 89년의 어느 날 식탁 유리가 깨져 교체했다는 내용을 발견했다. 30년 전의 일인데도 아버지의 한 줄 일기를 보는 순간 그즈음의 식탁 모양까지 또렷이 떠올랐다.
우리 집 식탁은 완전히 동그랗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각이 진 것도 아니었다. 식탁의 네 군데 모퉁이가 꽃잎처럼 물결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독특한 디자인이었는데 새로 유리를 맞출 때 그 모양대로 살리기가 어려웠다. 아마도 유리 가게 여러 군데에 물어보는 수고 끝에 간신히 맞췄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내가 식탁 유리가 깨진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라고 엄마와 아버지에게 물었다. 내 질문에 두 분이 마주 보며 웃었다.
"설마, 우리가 싸우면서 깼겠니?"
뜨거운 냄비를 받침 없이 놓았더니 그대로 유리가 쪼개져 버렸다고 했다. 한소끔 열기가 빠졌을 거라고 여기며 별다른 생각 없이 식탁 위에 올려놓은 냄비가 유리를 못쓰게 만들 줄은 몰랐던 거다.
스무 살 무렵. 밥 한 번, 국 한번 제대로 끓여 본 적 없던 나는 뜨거운 냄비가 유리를 쪼개서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 사뭇 놀랐던 것 같다. 커다란 식탁의 깨진 유리는 그 자체만으로 흉기로 변했고 그것을 내다 버리는 데에도 꽤나 신중을 기해야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나중에 시집가게 되면 조심조심 행동해서 유리를 깨는 일은 없게 하라고 했다.
"왜요?"
"왜요는 무슨 왜요? 왜요는 일본 담요가 왜요다."
아버지는 철없는 막내딸의 "왜요?"라는 질문에 날마다 그런 농담으로 맞받아쳤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깨진 유리가 위험하니까 그렇지. 치우다가 손이라도 베이면 어쩌냐?"
시집을 늦게 갈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나는 밥 한번 해 보지도 않고 뭐가 그리 급했는지 서둘러 결혼을 해버렸다. 그리고 유리 깨지 않게 조심하라던 아버지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설거지할 때마다 밥그릇, 국그릇, 컵까지 돌아가며 깼다. 마지막엔 분을 못 참고 식탁 유리까지 깨버렸다.
내가 이러고 사는 것을 아버지가 알면 얼마나 기막혀할까? 상황은 사람을 구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그 사람의 됨됨이만 드러내 줄 뿐이라고 말이다. 아무리 화나는 상황이라고 해도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쳐서는 안 됐다. 유리가 깨지던 순간 느꼈던 자괴감을 기억한다. 멀쩡한 유리를 깨버렸다는 자책, 흉기로 변해버린 유리조각을 치우는 번거로움, 새로운 유리에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안타까움 등등. 화만 참았어도 느끼지 않았을 복합적인 감정들로 인해 한동안 괴로웠다.
아버지 일기 수첩에서 발견한 식탁 유리라는 글자 앞에서 다짐을 했다.
'다시는 내 감정에 이끌려 나를 위험하게 하거나 두고두고 마음 괴롭힐 일들은 만들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