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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Feb 06. 2024

6. 젊은 그대, 말 한마디라도 가벼이 하지 말길…

템플스테이 로망스


템플스테이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면, 사무소에서 각자 옷과 키를 받아 들고 나온 무리는 꽃조끼를 입은 여자를 따라 사무소 앞에 있는 백 년은 넘어 보이는 벚꽃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대기하고 중이었다.


“언넝 나오셔! 다들 기다리고 계셔! “


사무소 쪽을 쳐다보며 미처 운동화 한 짝을 다 구겨신지 못한 남자 직원을 향해 꽃조끼 여자가 다그치듯 소리쳤다. 게임에 빠진 여고생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그곳으로 향했고 자신에게 관심이 쏠린걸 온몸으로 힘겹게 받아내듯 천천히 몸을 일으킨 청년의 얼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들킬까 봐 먼산을 바라보았다.


운동회 앞부리를 콩콩 찍으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그의 휘날리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땀에 젖어 있었다.

분홍빛이라기보다는 빛바랜 팥죽색 법복 바지를

입고 회색 반팔티를 입은 그의 갈라진 가슴이 노안이 온 나의 맛탱이 간 눈에도 보일 지경이었다.

수줍은 듯 팥죽색 조끼를 입으며 앞섭을 여미는 그의 섬섬 옥수 같은 손가락은 일평생 밭일 같은 거 못해보고 자란 연필 잡은 손임에 분명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템플스테이 안내를 맡은 이 서윤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서른 정도 됐구요 원래는 충청도 쪽에서 공부하다가 여기 스님께서 부르셔서 와있습니다. 오늘부터 절에서 지켜야 할 것들과 식사시간 예절 등등을 알려드릴 예정이니까 모르는 것 있으시면 언제든 질문해 주세요!”


칠성 사이다 맛보다 덜 스윗하고 초정리 탄산수 같은 싱싱하고 귀에 활어가 팔딱거리게 하는 시원한 목소리로 한치의 막힘없이 술술 자기소개를 하는 젊은 남자.


“와따메…여그는 뭐 하러 들어와 있다요? 서울 가서 연예인해야 할 얼굴이구만!”

“연예인 누구 닮았단 소리 솔찮히 듣겄는디? 거시기 누구 닮았는디 이름이 생각이 안나부러”

“그러게요… 절에 계시기 너무 아까운 외모시네.”


잠자코 게임에만 열중하던 여학생이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남자 쪽을 보더니 처음으로 핸드폰을 쥐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운 걸 깨달은 듯 양볼에 불그스름해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이 무더운 날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살며시 풀어 손부채를 하는 정다슬 양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꺽다리 총각의 어이없어하는 눈빛마저 재미있게 느껴졌다.

무리의 가장 뒤쪽에 있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그렇게 그 젊은 남자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과 무리의 변하는 표정들을 포착하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청년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자, 이제 여러분 소개 간단히 해주시고 각자 방에서 쉬시다가 4시에 다시 여기에서 모이겠습니다. 어디에서 오셨는지, 왜 오시게 됐는지 정도면 되겠습니다”


“우리는 저 멀리 전라도 순천에서 왔는디 69년 동창생끼리 새끼들이랑 서방 없이 우리끼리 멀리 가보자 해서 온 데가 여가 되았는디 좀 시끄러와도 순수항께 친하게 지내봅시다잉“

어디서 구했는지 스님들 쓰고 다니는 밀짚모자를 쓴 동창생 무리 중 가장 작고 땅딸한 여자가 분홍빛 색안경을 고쳐 쓰며 소개를 마쳤다.

그러자 꽃조끼 입은 여자와 젊은 청년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은 박수를 쳤다.

뒤늦게 박수를 따라 친 나는 내 고향 여수와 멀지 않은 곳에서 온 그녀들이 반갑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한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저는 고3 딸내미랑 왔고 대전에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짧게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수그리는 수험생 부모의 번뇌가 내게까지 느껴질 지경이다.


“저희는 안산에서 왔고요. 템플스테이는 처음인데 기대되네요. 아 보시다시피 커플이에요”

말없던 청년이 언제 다시 잡았을지 모를 손깍지를 올리며 자신들의 현재 상황을 알린다. 남자는 위험을 감지하면 용감해진다더니 미남을 앞에 두고 자꾸 귀여운 척을 떠는 여자 친구를 방어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내 차례다.

내가 말하려고 뜸을 들이려는 찰나에 순천에서 왔다는 무리 중 하나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짝은 서울서 왔지라? 꼭 서울사람 맹키로 생겼어”


흠… 나도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서울이라고 이마에 쓰여 있나요? 하며 너스레를 떨고 싶다.

그러나 나도 뭐 서울 근교 이른바 경기도에 사는지라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뭐라 말할까 하다


“아… 예… 저는 서울은 아니구요, 음 경기도에서 왔습니다. 쉬러 왔구요…이상입니다”


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부담스럽기도 하거니와 내 평생 다시 안 볼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한 얘기들을 늘어놓기 싫어서 무언가 더 얘기해 주길 바라는 그들의 애절함을 뚝 끊어버렸다.

난 당신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며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게 싫으니까.


“엄기언 님은 혼자 오셨네요? 이따 공양할 때 저랑 같이 먹음 되겠네요. 괜찮으시죠?”


이 세상의 선함을 다 모은 듯한 반짝이는 눈에 적당히 탄 피부 그리고 거뭇거뭇 수염이 자라는 턱과 구레나룻, 소지섭 이후로 이렇게 반듯하고 단정한 코를 본 적이 있었나 남자의 날렵한 턱선과 높은 코는 적당한 도시미를 풍기고 있었다. 본인의 손으로도 가려지고 남을 만큼 작은 얼굴에 키는 왜 구척장신인지 부처님이 이 아이한테 모든 걸 몰아주신 것 같다.


그런 그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내게, 나만을 바라보며 말을 건네주었다.


“아…네 ㅎㅎ“

부끄러웠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친다.

얼굴에 표정이 드러날까 봐 더 띠꺼운 표정을 지어본다.

그리고 뒤돌아 서서 내 옷매무새를 다시 고쳐 본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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