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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May 21. 2024

최종회. 나는 이제 산다.

템플스테이 로망스


그녀를 파묻고 다시 흙을 덮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주위의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아 흘뿌렸다.

그리고 땀범벅이 된 우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산속의 시간을 바라보았다.


“노량진에서 공시공부할 때부터였어요. 학원 가기 전에 컵밥을 먹고 있는데 옆에 있는 여학생이 500원이 부족하다며 다시 돌아서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불러 컵밥을 사 먹였어요. 그게 시작이었나 봐요.”


산바람조차 불지 않는 산의 중턱에 걸터앉아 옷으로 이마의 땀을 닦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교실에 갔더니 그녀가 있었어요. 그래서 같은 수업 듣는 사이였구나 하며 제자리에 앉았는데 갑자기 바나나 우유를 내밀더라구요. 그래서 놀랬는데 웃으며 잘 먹겠다고 고맙다고 한 것 뿐인데…그날 이후로 매일 제 옆자리에 앉더라구요. 제가 불편해하는 걸 느끼는지 느끼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지 제 옆에 앉은 사람과 말싸움까지 하면서 제 옆을 고집했어요.”


“난처했겠네요…”


남들의 눈과 귀를 사는 건 힘든 일이다.

더욱이 원치 않을 때, 차가운 눈총의 주인공이 되는 건 정말 가슴 졸이는 일임을 알기에 그가 난처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이었요. 제가 사는 고시원에 친하게 지내는 누나가 있었는데 저한테 오더니 갑자기 뺨을 때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너 때문에 나가는 거라며 그따위로 살지 말라고 울면서 소리치더라구요. 무슨 일인지는 총무님한테 들어서 알게 됐는데 더 소름 끼치는 건 누나가 나간 방에 그 애가 새로 들어왔다는 거였어요.

알고 보니 그 애가 누나와 제가 밤마다 고시원 옥상에서 애정행각을 한다며 총무한테 더 나쁜 건 날 유혹한 누나라며 없는 말을 지어내서 고시원이 한바탕 난리가 난 후였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누나한테 책 빌리러 공용주방에 갔다가 마주친 누나한테 맞은거구요.“



“미친….”


나도 모르게 망자에 대한 욕이 나왔다.

그래도 싸다고 생각하며 내 입에서 거친 욕이 나온 걸 희미하게 들은 그가 나를 다시 흘끔 보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악몽 같았어요. 모든 사람들이 저를 피하고 심지어는 행동거지 똑바로 하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학원에서도 사람들이 제 주위엔 앉지도 서지도 서성거리지도 않더라구요,. 오직 한 사람만 빼구요.

정말 진절머리가 나서 한 번은 진지하게 카페로 불렀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제발 꺼져달라고 “



“그랬더니요?”


궁금했다. 여자가 꺼지라는 소리를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것도 좋아하는 남자한테 그런 소릴 들었다면 아마 피가 천장까지 솟구쳤을 것이다. 분노의 피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 애가 씨익 웃으면서 얘기하더라구요. ‘나는 이 세상이 우스운 년이야. 태어날 때부터 날 버린 부모들도 우습고 고아원에서 날 따먹은 새끼도 우습고 스무 살 됐다고 돈 몇 푼 쥐어주고 나가라고 한 원장새끼도 우스워. 다 우스워. 근데 넌 우습지가 않아. 그냥 넌 우습게 느껴지지가 않아. 네가 날 아무리 피해도 비아냥거려도 난 널 우습게 느끼지 않아. 이게 사랑인 걸까? 후훗…’ 이러면서 소름 끼치게 껄껄껄 웃더라구요. 너무 무서웠어요.”



남자애는 공부도 취업도 다 포기하고 이 절 저 절 다니며 그녀를 따돌렸단다.

그런데 몇 년 만에 홀연히 이 절을 찾아온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고 했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사이도 아닌 것 같이 그렇게 수행자의 모습을 하며 사는 그녀를 보며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졌다가도 한 번씩 혼자 쉬는 그의 방에 몰래 찾아와 몸을 섞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 또 제방으로 돌아가는 걸 몇 차례 거치면서 둘 사이는 연인도, 파트너도 아닌 이상한 관계가 되었다.


절에서도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조금만 친절하게 굴어도 그 여자들에게 돌을 던지거나 공양후 설거지를 하며 욕지거리를 해댔다고 했다.

그래서 공양간 사람들은 그녀가 그냥 정신이 이상해서 절에 수양하러 온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던 차에 내 차례가 왔고…. 내 손에 그녀는 죽었다.



난 죽으러 왔다.

이 절에.

아니 이 절의 산에 있는 맵시 좋은 소나무를 골라 목을 메달을 참이었다.

어떻게 죽을지 이미 생각해 뒀는데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죽인 꼴이 되어버렸고 내가 골라둔 나무 위에 내 목을 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살고 싶어졌다.

이 모든 게 발각이 될까 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날이 슬슬 밝아오네요. 4시 되면 스님들 다들 깨시고 하루가 시작돼요 그전에 내려가실까요?”


그가 손에 묻은 흙을 탈탈 털고 먼저 일어나더니 엉덩이에 묻은 흙들도 마저 털기 시작한다.

나도 일어나 똑같이 흙들을 탈탈 털었다.

마치 내 몸에 덕지덕지 붙었을 것 같은 그녀의 혼을 털어내듯.



그가 낮에 일하던 템플스테이 사무소로 가더니 옷 한 벌을 가지고 왔다.


“지금 입고 계신 건 저 주시구요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어차피 한꺼번에 세탁 공장으로 보내질 거라 안심하셔도 되구요”


그때서야 내 몰골이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촌스런 팥색 절복에 튄 그녀의 핏방울, 탈탈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손끝까지 물든 핏자국. 그리고 얼굴까지 소름 끼치게 튄 핏방울.

그가 건네준 옷을 받아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둥그렇고 하얀 비누로 박박 온몸을 문질렀다.

머리를 감고 온몸이 하얘질 때까지 비누칠을 해댔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목탁소리.


새벽예불을 알리는 스님들의 행렬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왔다.

머리를 말리고 얼굴엔 스킨과 로션을 발랐다.

그리고 비비크림을 바르며 기미와 주근깨를 커버하고 연한 립글로스를 발랐다.

오늘 신을 새양말을 꺼내 신으며 새벽공양을 하러 나갔다.


언제 왔는지 스님들 곁에서 방석을 가지런히 깔고 있는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으나 내쪽에서 먼저 눈을 피하고 말았다.

이상하리만치 그의 눈을 보니 다시 심장이 뛰어오는 것 같다.

설레임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죄책감… 두려움? 내 죄의 조력자이자 오히려 본인의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평생 피하고 싶던 여자를 없애준 내게 그는 감사해야 마땅하다.


아무 생각 없이 불경을 외며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무엇인가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어느샌가 두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걸 감지한 순간 그가 조용히 지나가며 흰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여자들이 킥킥 거리는 소리까지도 선명하다.



새벽예불이 끝나자마자 방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방에 누워 잠을 잤다.

꿈에서 나는 돌멩이로 한없이 공벌레를 내리치고 또 내리치며 퍽퍽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벌레들을 모래로 덮었다.


바깥에서 남도 여자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와따…. 끝방 처녀는 아직까지도 자는갑네. 예불에도 안 나오고 아침밥이라도 먹어야 속이 풀릴건디”


“놔둬부러. 그 밤에 그 난리를 쳤는디 무슨 낯짝으로 사람들하고 같이 밥을 먹겄어? 챙피라는 것도 알아야제. 더 자라고 놔둬불고 우리끼리 가세.”


그리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공양간으로 가며 혀를 끌끌 차는 그녀들의 소리가 멀어지자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켜 조끼와 바지를 벗고 내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짐을 싸서 절복을 들고 사무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벌써 퇴실하시게요? 아침이라도 드시고 가시지.”


출근한 사무소의 여자가 절복을 받아 들고 바로 회색 주머니 뭉텅이 속으로 옷을 섞는다.


“네 집에서 연락이 와서요. 어서 내려가봐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아참 잠시만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서서히 몸을 돌려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 쳐다보니 찻집 쿠폰을 주며 내려가는 길에 있는 찻집 쿠폰인데 템플스테이 한 손님들께만 제공된다면서 꼭 쓰고 가라고 했다.

알겠노라며 감사하다며 쿠폰을 받아 들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주차장에 세워둔 내 아우디의 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다음 시동버튼을 눌렀다.

내비게이션을 집으로 향하게 하고 습관처럼 백미러를 통해 얼굴을 보려는데 저 멀리 그가 보인다.

그가 날 보고 있다.

그저 망부석처럼 서서 내가 떠나길 기다리며 서 있다.



시동버튼을 누르고 절에서 내려오다 옆에 보이는 찻집을 보며 열려진 창문밖으로 쿠폰을 주먹으로 한 번 구겨 던져버렸다.

그리고 창문을 정성스레 올렸다.


차 안에 남은 건 이제 머리에서 나는 싸구려 비누 냄새밖에 없다.

살았다.



#스테이 #삶과 죽음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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