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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May 09. 2024

13. 그와의 협력

템플스테이 로망스

대학 때였던가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아무거나 안주를 내주는 호프집에서 열댓명이 모여 영어로 지껄이며 있는대로 술을 먹은 날이 있었다.

영어회화 동아리라 그런지 방학때마다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뉴질랜드로 단기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술만 취하면 되도 않는 영어로 취기를 발산시키곤 했다.

그중 최근에 캐나다로 연수를 다녀온 한 언니가 술이 과하다 싶더니만 화장실을 다녀온 후 그대로 쇼파에 엎어져 잤다.

자나보다 했는데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르렀나보다.

집에 갈 시간이 지나도 깨어날 생각을 안한다.

동아리 오빠들이 하나둘씩 언니의 양쪽 어깨죽지를 자신들의 어깨에 짊어지며 질질 끌어 어디론가 데려가더라.

언니집이 학교에서 먼걸 내가 아는데…언니가 그래서 소형차 한대 뽑아서 학교에 주차하고 다니는 걸 아는데…오빠들은 언니를 어디로 데려가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내가 평소에 맘에 들어했던 동기녀석이 한잔 더 할꺼냐고 묻는 말에 기숙사 통금시간이 간당간당한 그 시간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와 자주 갔던 바에 들러 블랙러시안을 시켰다.

블랙러시안 역시 남자친구가 처음으로 알려주었던 칵테일인데 난 원래부터 이런거 좀 마셔봤다는 늬앙스로 그아이 앞에서 자연스레 주문했다.

그리고 그 친구도 나와 같은 걸 주문했다.


그 이후로 기억이 가물거린다.

우리는 5월의 신록이 깃든 학교를 거닐었고 사소한 장난을 쳤으며 손이 스치는 그 짜릿함을 느끼며 농담을 하며 학교를 돌았다는 기억이 남을 뿐이다.

그리고 동이 틀때까지 작은 연못 앞에 있는 벤치에 서로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잠을 자다 일어났다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의 배려였거나 그 친구의 순진함이었거나 둘중 하나였겠지만 로맨틱한 순간 아닌가!



죽은 여자의 몸집은 나보다 작았지만 축 늘어진 그녀의 몸무게를 나혼자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더구나 내가 봐둔 산 중턱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이 들자 꽂아둔 숟가락을 수욱 뽑아내고 그 남자가 기거한다며 필요한 일이 있으면 오라고 했던 곳으로 달려갔다.,



밤중의 산사는 고요하다,.

아니 풀벌레들의 향연이 대단하다,


대웅전 앞을 가로질러 그가 있을법한 장소로 뛰어가는 내가 그를 만나러 가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 미친 짓을 해서 인지 모르게 가슴이 뛴다.



여러채의 방 가운데 유독 불이 환한 방이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문고리를 흔들며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기요….저….템플스테이 행자인데요….잠시만요”


그러자 작은 음악소리가 뚝 끊기더니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그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뭔가 들키면 안될 것 같은 얼굴을 잔뜩하며 그에게 잠시 같이 가주면 좋겠다고만 했다.

그러자 그는 순순히 운동활 신더니 내 뒤를 따라온다.


숨진 그녀가 있는 방으로 향하는 내내 가슴이 쿵쾅거려 이게 이 남자와 함꼐 여서인지, 나의 살인 현장을 보여주기 직전이어선지 모를 가슴 떨림이 느껴졌다.

갑자기 산에서 부는 바람에 실려오는 밤꽃 나무 향기가 정신을 아득하게 한다.



“여기….잠깐 들어오시겠어요?”


그녀의 방앞에서 지체없이 그를 끌어들인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뭔가 직감하듯 신발을 신은채로 방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연보라색 이불에 둘둘 쌓인 그녀를 확인도 하지 않은채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서있는다.

그 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혼자 옮기기는 너무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남자는 말없이 여자의 머리쪽을 잡고 내게 다리 쪽을 들라고 한다.

둘이 드니 한 결 가볍다.

엉덩이쪽이 살짝 내려앉았지만 옮기는 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삼성당 뒤로 나있는 돌계단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거기서 100미터만 지나면 내가 죽으려고 했던 소나무가 있었다.

실하고 아름드리 가지를 펼친 푸르른 소나무.


그는 아무말 없이 앞장을 서며 삼성당앞의 진한 보랏빛인지 푸른빛인지 모를 꽃들을 스치며 누구보다 민첩하게 앞장서서 성큼성큼 돌계단을 올라간다.

그를 뒤에서 바라보는 내게 양심은 없다.

그저 그와 함께 일을 저지른 이 순간이 든든할 뿐이다.



“힘드시죠?”


“,,,,,,,”



“힘드시면 제가 앞에서 들께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왠지 불안하다.

그는 나를 신고할까?

아니.

그럴수가 없다.신고할 거 였으면 여자를 본 순간 했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가뿐 숨을 들이쉬며 내가 찜해둔 소나무를 사력을 다해 찾아낸다.

밤이 되니 이 나무가 이나무같고 그나무가 그나무 같지만 내가 찜해 놓은 나무는 남다른 아우라가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열매를 맺은 그 나무는 우리를 거기서 묵직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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