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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Jun 03. 2023

20. 합격, 홈스쿨링을 마치며

선과 나무의 홈스쿨링



입학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선은 밖에서 나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에서 아이들이 하나, 둘씩 나오는데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시험을 마치고 돌아갈 때, 나무는 교장 선생님과의 특별 면접에 이어 (홈스쿨링을 받는데 부정적인 의견을 내었던) 남자 선생님과 (남자 선생님과는 성향이 다른) 여자 선생님의 면접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남자 선생님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나무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자, 여자 선생님이 부드러운 말투로 나무에게 “엄마가 밖에서 많이 기다리시겠다!”라고 말하고, 남자 선생님에게 “선생님! 이제 그만하시죠! 얘도 시험 보느라고 힘들었는데……”라고 말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아빠는 거래처의 사무실에서 선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갔다.

창고로 쓰는 컨테이너 박스 뒤에서 초겨울의 차갑고 높은,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주르륵, 뺨에 눈물이 흘렀다.     

                                    


                                                                

합격 후, 호감을 갖고 나무를 지켜보던 수학 선생님이 선에게 말했다.

입학시험에서 아무도 풀지 못하는 고난도의 문제를 나무 혼자 풀었고 3차까지 진행된 입학 전 시험에서, 2차에서는 나무가 1등을 했다고.     


선과 나무가 EBS, 지식채널을 보는데 자막에 교육방송 활용 사례 수기를 공모한다는 광고가 지나갔다. 나무가 선에게 말했다.     

“엄마! 나 저기 한 번 내볼래!”     

“입학 전 과제물이 산더미인데 언제 다 하려고?”     

“그럼, 엄마가 해볼래?”     

“저런 걸 뭐, 엄마는 관심이 없어!”     

“엄마가 안 하면 내가 한다!”     

“알았어! 엄마가 할게! 그런데 언제까지야?”     

“오늘까지!”     

“엄마 오늘 약속 있는데……”     

선은 두 시간 동안 쓴 것을 방송국에 메일로 보냈다.     

     


                                                        

                   홈스쿨링을 마치며……      



‘E과학 고등학교 합격’


아이는 자못 흥분되어 마법의 양탄자라도 탄 듯, 나비처럼 (춤을 추듯) 동선을 그리며 행복해했다.

아이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만약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어떠하였을까? 하는 마음에,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다.


앞서 진행되었던 영재 학교 입시에서 떨어진 것이, 아이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을 안겨주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과학고의 합격으로 자신감을 찾은 것 같아 안도되었다.


홈스쿨링……

힘들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녹록한 여정은 아니었다.

아이의 발달 단계를 파악하고 수준에 맞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고스란히 엄마 몫이기에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다행히 나무는 책을 좋아했다.

책을 좋아하는 나무에게 책 읽는 시간은 곧 휴식 시간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신문을 보는 시간도, 과학 잡지나 씨네 21을 읽는 시간도 나무에게는 모두 휴식 시간이었다.

그래서 따로 국어나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었고, 사회나 과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신문을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학습이 되었다.     


나무가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보기 전, 검정고시에 대비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를 읽고 주제와 글감을 찾고, 줄거리를 요약하고 문단 나누기를 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무는 첫 번째 수업에서 주제와 글감을 정확하게 찾아냈다.

그리고 줄거리 요약도 잘했다. 까다롭게 생각할 줄 알았던 문단 나누기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이게 독서의 힘인가?

깜짝 놀랐다.

굳이 6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까지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에게 문법만 간단하게 설명해 주고 마무리했다.


중졸 검정고시를 보기 전에도 시험공부는 책꽂이에 꽂혀있는 교과서를 한 번씩 읽어보는 것으로 끝냈다.

과학 과목만 참고서를 한 번 더 봤던 것 같다.

그것도 어릴 때부터 과학 잡지를 구독하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한 번씩, 쓱 훑어보고 가는 정도였다.


나무는 5학년 나이 이후로는 운동 외에는 어떤 사교육도 받지 않았다.

홈스쿨링을 하면서 사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정서에 맞지 않았고 굳이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EBS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홈스쿨링을 하는 내내 EBS는 늘 아이 곁에 있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었다.

아이는 학년 구분 없이 관심 있는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시청하였다.

빌 아저씨의 과학 교실, 과학의 눈, What’s up Doogi, 문단열의 잉글리시 카페, 장학 퀴즈 등등…….


중학교 2학년 가을, 나무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영재교육원 추천으로 한국 과학 재단에서 진행하는 호주 ASMS 영재학교 연수에 국비로 참가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기쁜 소식이었지만 나무의 영어 실력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교육과정은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성취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수학을 제외한 어느 과목도 교과서조차 공부하지 않았다.

영어 공부도 예외 없이 ‘프렌즈’나 ‘길모어 걸스’ 같은 미드나 디스커버리 채널 등을 즐겨보는 정도였다.

든든하게 기댈 곳은 EBS 뿐이었다.      

방송 시간표를 보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영어 시청 시간표를 만들었다. 중학교 영어는 기초부터 마무리하자는 의도였고 고등학교 영어는 수심이 깊은 학습의 바다에 빠뜨려보자는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중학교 영어는 선생님들이 강의하는 족족 잘 받아들였고, 고등학교 영어는 나무가 좋아하는 몇몇 선생님들의 강의를 중심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3개월 후, 나무는 호주로 떠났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다음에야 나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영어 수업이 힘들지 않느냐는 엄마의 걱정에 나무는 “영어가 의외로 쉽더라!”라고 말하면서 친구들이 쇼핑을 갈 때도 자기를 찾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3주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무의 페이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Well done on your creative story! Excellent presentation and understanding of the ‘Dream Time’”     


나무가 중학교 3학년이었던 해는 검정고시와 특목고 입시가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나무는 3월에 맹장 수술을 하게 되었고, 후유증으로 대학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아이의 건강이 먼저였기 때문에 영재고나 과학고의 꿈은 저 멀리 놓아버렸다.

그런데 차츰 건강을 되찾은 6월에, 나무를 아끼시는 영재교육원 원장님이 직접 전화를 주셨다.

곧 한국 과학 영재학교 원서 접수가 시작되는데 추천서를 써 줄 터이니, 원서를 넣어 보라고.

중학교 과학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KMO 1차에서 금상을 탄 자만심도 있고 영재학교는 선행보다 창의력을 중요시한다고 하니까, 그동안 읽어온 과학 관련 책이나 과학 전문 잡지가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수학은 그런대로 풀었지만 선행이 되어 있지 않은 과학에서 합격에 충분한 점수를 얻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가는 것이 로망이었다. 이제 기회는 과학고 입시뿐이었다.

서점에서 EBS의 중·고등학교의 과학 교재를 몽땅 구입해서 과학 강의는 몽땅 듣도록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무는 공통 과학을 다루고 있는 선생님들이 기초는 빠짐없이 챙겨 주니까 고등학교 강의만 듣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물리, 화학, 생물, 지학 등에 집중하여 공부했다.


선생님들의 열정은 정말 대단했다.

우선 먼저 떠오르는 분은 학생들을 늘 애제자라고 불러주는 생물 선생님!

나무는 그분이 만화영화의 요술 공주처럼 ‘짠’ 하고 등장할 때마다 입이 귀에 걸렸고, 선생님이 애제자라고 불러주는 호칭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나도 그분의 강의가 재미있어서 몇 번인가 하던 걸레질을 멈추고 나무와 같이 들었다).


그리고 어려운 물리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 물리돌이 선생님, 또 전라도 사투리에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송송 배어나는 지학 선생님, 이분의 암기 비법을 전수받을 때, 나무의 표정은 공부의 스트레스는 말끔히 날려 보낸 그야말로 구김살 없는 무아지경이었다. 아마도 선생님의 소년의 것과도 같은 순수함이 그대로 전이된 듯싶었다.

그리고 가르치는 일은 정말 사랑하는 또 다른 멋쟁이 물리 선생님, 말씀 한 마다 한 마디에 혹 아이들이 벗어날까, 조심스럽게 배려해 주시는 말투가 전파를 통해서 그대로 전달되었다.


나는 EBS 선생님들을 보며 사명감이 남다르고, 정말 가르치는 것도 타고난 분들이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들은 과학고를 지망하는 나무에게는 환상의 드림팀이었다.


그리고 지식채널……

수업이 끝나고 5분 동안 단편 영화처럼 흐르는 영상은 세상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사춘기의 아이에게 새로운 사고의 길을 터주고 삶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시켜 주는 훌륭한 교재였다.

수업이 끝나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총총한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나무의 표정은 새로운 것을 발견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아이는 절박한 언어로 만들어진 영상을 보며 분노했고, 경탄했다.

마음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시야를 얻은 것 같았다.

나무는 EBS를 통해 실력을 쌓았을 뿐 아니라, 세상을 성찰할 줄 아는 시선까지 갖추게 되었다.


파란 하늘이 눈부신 날, 3차에 걸친 시험을 보고 나오는 나무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밝고 당당해 보였다.     

                                          



선은 장려상을 받았다. 그런데 며칠 후, EBS 뉴스 팀에서 전화가 왔다.     


“교육 방송 활용 사례 수기 중에서 내용이 좋은 것을 골라 교육뉴스에 내보내는 기획인데 첫 번째로 나무의 이야기를 찍고 싶어서요. 나무는 지금 어디 있어요?”     


“나무는 지금 입학 전 프로그램 때문에 학교에 있는데…… 어디서 촬영을 하시는 건가요?     


“나무가 생활하는 걸 찍어야 되니까, 집에서도 찍고 학교에서도 찍으면 하루나 이틀정도 걸릴 거예요.”     


솔깃했지만 순간,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 과정에 있는 아이를 방송에 노출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아이의 고유한 삶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성장에도 방해가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길 때문에 아이의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침해될 것 같아 염려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타인의 지나친 관심은 아이에게 바람직한 교육환경이 될 수 없었다.


 “저, 죄송한데 거절해야 될 것 같아요. 홈스쿨링을 해서 그렇지 않아도 시선이 집중되는 데, 방송까지 나가면 아무래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이제 처음 시작하는 학교생활에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 내용은 제11회 교육방송 활용사례 수기 공모에서 입상한 것을 약간 변형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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