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말처럼 용기가 백배 요구되는 일이기도 했다.
생각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나의 유희였다.
일곱 살의 나는 추운 겨울날을 편물점의 유리문 밖에서 두세 명의 여자들이 온돌바닥 위에 마주 앉아 요꼬(니트 편물 기계)로 편물을 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초등학교 저학년 여름 방학 때는 공사장에 쌓인 붉은 벽돌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의 모형을 쌓으면서 더운 한낮의 지루함을 달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 생각 속에, 그 시간 속에 분명 다른 세계가 숨어 있다고 확신했다.
내가 들어가야 할 세계의 문 밖에서, 나는 내 주먹만큼 열린 창을 통해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우선 학교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수학 시간은 너무 지루해서 오히려 나의 집중력을 헤칠 뿐이었다.
쉬는 날(일요일이나 공휴일), 집에서 2~3시간 정도 예습을 해서 일주일 동안 배우는 양을 미리 공부하고, 선생님이 설명할 때에는 그냥 예의상 바른 자세로 집중하는 척하고 앉아 있었다.
그 시간은 결국 내 생에서,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 시절의 삶은 내 삶이 아니라고 내려놓았던 것이다.
학교의 비극은 생각을 멈추게 하는 데 있었다.
‘가지 않은 길’
남편의 사업이 부도만 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이에게 홈스쿨링을 시킬 용기를 내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 사업의 부도는 아이의 교육 문제에 있어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부도가 나자 우리 가족은 채권자들의 빚 독촉에 지방으로 갔다. 주민등록 말소자가 되었고, 아이는 공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공교육을 받으려면 아이를 할아버지 집에 맡겨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이의 손을 잡으면 아이의 따뜻한 체온이 가슴에 뭉클하게 전해져 왔다. 나는 차마 그 아이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학령기가 되면 누구나 다 학교에 가는데, 저 혼자만 학교에 가지 않으면 나무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 마음을 졸이고 있던 중에 지인으로부터 화교 학교에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좋은 대안 교육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중국어 하나를 더 익힌다는 말도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무엇보다도 학교에 입학하는데 신원을 확인하는 어떤 서류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소도시의 화교학교의 환경은 열악했다.
1,2, 3학년 합반 수업에, 그 수업의 내용도 대부분 한자를 쓰고 외우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학부모들의 관심도 오직 중국어를 습득하는 일에만 모아져 있었다. 마치, 중국어만 익히면 아이들의 장래가 보장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분위기에 휩쓸리면 교육의 미아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매월 15만 원씩 내는 수업료도 부담이 되었다.
그 무렵 언론에 외국의 홈스쿨링 사례가 자주 소개되었다.
답답했던 시야가 트인 기분이었다.
교직에 있었던 언니와 형부의 지지도 있었지만 18개월 된 나무에게 한글을 가르쳐 본 경험도 있어 무엇보다 아이와의 교육적 소통에 자신이 있었고, 또 아이는 엄마와 뱃속에서부터 연결되어 있어서 엄마는 누구보다도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때 아이는 어린 나이였지만 나를 따라 신문을 즐겨보고 있었기에 여러 지면에 소개되었던 홈스쿨링에 대하여 호감을 가졌던 것 같았다.
하루의 일과는 산책을 하고 간단한 아침과 함께 KBS, 제 1FM의 클래식을 들으며 신문을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어린 나이일수록 교과서가 주어지는 것보다 세상을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더 소중한 공부라고 생각해 수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의 교과서는 그저 책꽂이에 꽂아놓고 관심이 갈 때마다 동화책처럼 읽어보는 것에 그쳤다.
교과서에는 다양한 내용의 지식이 축척되어 있지만 서로 다른 능력과 개성을 가진 아이들이 모두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깊이와 속도로 공부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만약 나무도 언제까지 진도를 끝내고 평가를 받아야 한다면 주입식 교육을 배제할 수 없지만 나무는 누구에게 평가를 받을 필요도,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배움의 양이나 속도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배움의 과정에서 쓸데없이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이 아이에게 맞는 편안한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아이를 화교학교에 보낸 2년 동안, 그리고 대학교 부설 영재교육원에 보내면서 아이들의 경쟁심이 아이들의 정서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은 실패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히는데 경쟁은 아이들에게 실패할 권리조차 빼앗아 갔다. 그리고 경쟁심이 유발되는 환경에 있는 아이들은 경쟁 전에 배워야 할 (많은) 가치들을 놓치고 가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경쟁을 부추기는 환경 속에서 과연 아이들은 무얼 배울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아쉽게도 경쟁은 많은 아이들을 눈앞에 가시적인 목표에만 집착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내심 홈스쿨링을 잘했다고 자신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하여 아이와 생각할 시간이 있었고 또 아이에게 실패할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 않다.
홈스쿨링 기간 동안 나도 아이도 경쟁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실패를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여유가 있었다.
실패를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는 훗날, 실패를 하더라도 금방 털고 일어설 수 있는 회복 탄력성도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화교 학교에 다닐 때, 밥상으로 쓰는 호마이카 상을 벽에 붙여 놓고 숙제를 하면서, 고즈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공부는 왜 하는 거야?”
아이로서 당연한 질문이었다.
“나무야, 게임 재미있지?”
“응!”
“게임을 하려면 게임의 규칙이나 언어를 알아야 하잖아! 그런 것처럼 공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칙이나 언어를 배우는 거야! 나무가 어른이 돼서 세상을 신나고 재미있게 살려면, 게임의 규칙이나 언어를 익혀야 하듯이, 공부를 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나무는 이미 유전자 속에 엄마 아빠가 저장해 놓은 게 많아서 그냥 유전자 뚜껑을 여는 노력만 하면 되는 거야! 유전자 뚜껑을 열면 별의별 것이 다 있는데, 그중에서 나무가 제일 신나는 것으로 골라 재미있게 놀면 되는 거야!”
나무는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는 듯, 웃으며 공부에 빠져들었다.
사업에 실패한 후, 우리 부부는 돈은 아이에게 물려줄 수도 없고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배움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염려도 없고, 평생 아이에게 삶의 의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에 읽었던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사로잡힌 영혼’ 또한 나에게 그러한 영감을 주었다.
라이히 라니츠키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독일의 문학 비평가이다(독일에서는 그를 ‘문학의 교황’이라고 부른다).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유대인인 그의 삶은 파란만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치의 권력 아래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그가 문학 비평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지성, 곧 배움의 힘이 아니었을까.
마치 훈련으로 뇌가 잘 발달된 쥐가 미로를 더 잘 통과하듯이, 지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이 삶의 역경도 잘 통과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에서 특히 매료되었던 부분은 라이히 라니츠키가 트럭의 짐칸에 올라 초라한 행색으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동(도피) 중이었을 때,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라이히 라니츠키를 바라보고 “당신은 많이 배운 사람이지요?” 하고 묻는 장면이었다(오래된 기억이어서 표현까지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배움의 미덕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초라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뭔가 다르게 보이는 것, 나는 사람이란 지적인 성장을 거쳐 그런 고상함을 갖춰야 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를 낚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나도 아이에게 인생의 역경을 풀어나갈 수 있는 힘을 키워주고 싶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배움의 기쁨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존재로 키우고 싶었다.
홈스쿨링을 하는 동안 나무와 나는 서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나무는 일찍부터 글을 읽은 탓에 책 읽기를 좋아했다.
배움과 독서는 불가분의 관계일 것이다.
나무는 동화책부터 시작하여 역사, 과학, 경제, 소설, 그리고 시사나 영화 잡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홈스쿨링을 시작한 배경에는 이러한 나무의 독서편력도 한몫했다.
라캉이 말했다.
“사람은 모국어를 통해 자기의 병리적 현상을 발견하고 치유한다고,”
건강한 사람이란, 언어를 통한 사고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활발한, 그렇게 끊임없이 성장하는 존재가 아닐까.
나는 만약 사람이 진화하는 존재라면 읽고, 쓰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사고력이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의 사고력을 위해 아이에게 사유할 공간이 주어지는 여백이 있는 교육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홈스쿨링 중에도 학원은 영어나 예, 체능 과목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 정도밖에 가지 않았다.
그것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기에 영재교육원에 입학하고 몇 달이 지난 다음에는 가지 않았다.
사업의 부도가 홈스쿨링의 트리거가 되어 주었듯이 사교육으로부터 멀어졌던 것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사람들은 “나도 돈이 있었으면 우리 아이한테 홈스쿨링을 시켰을 텐데……”하고 아쉬워한다.
나무는 홈스쿨링 과정을 통틀어 수학, 과학 과목은 어떤 사교육도 받지 않았다. 독학이었다. 나에게 배운 것은 사칙연산뿐이었다.
이것도 식탁 위에 과자를 풀어놓고 나눠주면서 수식을 써주고 설명해 준 것이 다였다.
아이가 어린이 집에 다닐 때, 우연히 두 자릿수 뺄셈을 하는 것을 봤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자기만의 방법으로 풀고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구구단은 외운 적도 없었다(이미 구구단의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게 된 후에, 화교학교에서 구구단을 외우게 했을 것이다).
곱셈은 그냥 교재의 풀이 방식을 보고 제 힘으로 풀었고 나눗셈은 어느 부분에서인가 딱 한 번 힌트를 준 기억이 난다.
나무가 올림피아드 문제를 풀다가 오타가 있어 저자에게 전화를 하면 저자는 깜짝 놀란다.
어떻게 올림피아드 문제를 혼자 공부할 수 있느냐고?
나는 사실 나무가 왜 수학을 잘하는지, 잘 모른다. 특별히 해 준 것이 없기에. 다만, 어렴풋이 아이의 독서 능력이 수학적 능력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아이가 수학 경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여기저기서 같이 공부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난감한 노릇이었다. 학원비도 고액인 데다 새끼 과외까지. 그렇게 하면 오히려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을 상실할 것 같았다.
여러 번 거절했지만 끈질기게 설득하는 엄마들이 있었다. 나는 끝내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을 했다.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왜 굳이 학원에 보내겠냐고!”
엄마들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영재교육원에서 나무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같이 공부하자고 했던 엄마들의 아이들은 영재교육원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나무가 다가가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나무는 자연스럽게 타 지역에서 온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공부도 놀이도 두 편으로 나뉘었다.
아이는 성적순이 존재하는 학교에서 벗어나서인지 누구에게도 자기의 풀이를 오픈하고 사심 없이 잘 가르쳐 주었다.
교수님이 과제를 주면 이 편의 아이들은 나무를 중심으로 머리를 맞대고 잘 풀어나갔는데, 저 편의 아이들은 잘하는 아이는 좋은 점수를 받고 못하는 아이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결국 심화 과정에 올라갔을 때, 저 쪽의 아이들은 대부분 탈락하고 소수만 심화 과정으로 올라가고 나무와 친했던 아이들은 대부분 심화 과정으로 같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나무가 영재교육원 추천 과학재단 지원으로 호주 ASMS 영재학교에 연수를 가게 되었다.
영재교육원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나무가 리더십이 뛰어나서 추천했다고.
이 일은 나무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어디에서인가 들은 것 같았다.
‘나, 개인 한 사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보다 그가 속한 조직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떻게 학원도 안 보내고 엄마가 다 감당하느냐고?
나는 그저 아이의 친구가 되어 줄 뿐이었다.
인생의 선배로서 삶의 과정 속에서 얻은 통찰을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었고, 내가 경험한 행복을 아이도 느끼게 해 주고 싶어 함께 생각을 나누고 음악회에도 데려가고, 같이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사회의 이슈가 되는 여러 가지 행사에도 함께 참석했다(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오히려 학교라는 담장 안에 갇혀있어 다양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음악회에서 연주가 끝났을 때 연주자와 청중이 모두 하나가 되어 느끼는 전율, 또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느꼈던 미덕들, 그리고 내가 가진 삶에 대한 감수성이 타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 주었던 문학 작품들―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사준 한국 문학 단편집을 읽고 알에서 깨어나는 기분을 느꼈다―나는 나무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영감을 얻길 바랐다.
또 나무에게 문화적 포용성을 길러주기 위해 아메리칸 아이돌이나 길모어 걸스 같은 외국의 프로그램을 같이 즐겨보기도 하였는데 나무가 간접적으로라도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폭넓은 안목으로 미래에 인생의 답을 얻길 원했다.
6.25를 겪은 친정엄마가 말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 통에도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살아남는다고.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에.”
나무가 초등학교 열한 살 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태풍 루사가 왔다.
아침에 눈을 뜨니 집 앞에 빗물이 무서운 기세로 철철 흐르고 있었다. 물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집은 비교적 높은 지대였지만 반 지하였으므로 집 앞으로 흐르는 물이 불어나면 우리 집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게 또 뭔 신나는 일이지?’라고 세상에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이걸 교육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전염시키는 것은 부모일 것이다.
나는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가 걱정됐지만, 아이 앞에서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판자를 구해 아이와 함께 집으로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막아 놓았다.
그리고 물을 준다는 동네 목욕탕으로 우산을 들고 나무와 함께 물을 길러 갔다. 재난이 닥치자 영업을 중단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목욕탕 할머니의 선행을 이야기하면서…….
나무는 동네 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풍경 속에 자기가 있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초등학교의 수돗가에서 또는 급수차 앞에서 줄을 서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길어 왔다.
나무에게 이 모든 것은 신나고 재미있는 경험일 뿐이었다.
인생은 긴 여행이고 우리는 상처를 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명체이다.
나는 나무가 인생의 긴 여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그것을 과정으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컵에 물이 절반만 남아있더라도 그 절반의 양에 감사하고 그 속에 있는 행복을 놓치지 않는 사람 말이다.
나는 고급 호텔의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좋지만 식구들끼리 모여 깔깔거리면서 라면을 먹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부도 이후, 우리는 반 지하의 월세 방에서 그렇게 10년 동안 간소하고 소박하게 웃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나무는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께서 보내주신 감자와 옥수수, 고구마는 나무에게 그저 맛있는 웰빙 식단일 뿐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정방문을 하는 담임선생님을 따라 부반장이었던 남자 친구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늘 깔끔한 옷차림의 그 친구는 우리와 함께 과외도 하고 스카우트(그 친구는 보이 스카우트, 나는 걸 스카우트였다) 활동도 했는데 집은 놀랍게도 조그만 부엌이 딸린 단칸 셋방에서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언니와 함께 쓰던 방 크기의 작은 방에 들어갔을 때, 좌식책상 위에는 어린이 잡지 ‘소년 중앙’이 발행 순서대로 쌓여 있었다.
나는 그때의 서늘함을 잊지 못한다.
5학년 때였다. 월말고사가 끝나는 날이면 그 친구의 엄마는 꼭 학교 정문까지 아들을 마중 나왔다. 엄마는 아들의 가방을 들고 따뜻한 미소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친구는 100원짜리 미스 미스터콘―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였던 김자옥, 노주연이 스키복을 입고 CF를 찍었던 퍼모스트 아이스크림―을 들고 포장을 뜯어가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그 친구는 누구보다도 유복하게 자랐다(그는 지금 투자금융 업계에서 꽤 알아주는 인물이 되었다).
나도 나무를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아이가 과학고에 입학하기 위해 이사 왔을 때부터 작년(고등학교 1학년) 5월까지 우리 가족은 원룸에서 살았다.
사방에 짐이 쌓인 원룸에서, 퇴근하고 들어온 아빠는 TV 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뉴스를 보며 저녁을 먹고, 나무는 그 옆의 컴퓨터 책상에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KMO 공부도 하고 과학고 입시도 준비했다.
어느 날, 가족이 함께 산책을 할 때, 내가 집이 좁다는 이유로 투덜거리자 나무가 말했다.
“그럼, 이 동네에 100 가구가 넘는 사람들은 뭐야? 이 사람들은 다 어떡하라고?”
나는 입이 다물었다.
이 아이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일까?
나무가 다섯 살(만으로 3살 반쯤 되었을 것이다) 때였다.
사업 때문에 매일 늦게 들어오는 것이 미안했던 아빠는 나무에게 같이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편지와 함께 흰색 피아노 전화기를 선물했다.
그런데 아빠의 편지를 읽던 나무의 분홍색 뺨에서 갑자기 굵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한 나는 “나무야! 왜 울어?” 하고 물어보았다.
나무는 조그만 어깨를 들썩거리고 흐느끼면서 말했다.
“너무 고마워서……”
아빠는 운전을 하다 문득 나무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이젠, 아빠가 너무 고마워서……
과학고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청소는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거야?”
간절하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응, 빗질부터 하고 마포 질은 엄마가 방바닥 걸레질 하듯이 구석구석 닦으면 되는 거야.”
“응, 고마워!”
더러 바보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지극한 아이.
지방의 소도시에서 살 때, 오랜만에 친지들이 찾아오면 나무의 밝은 얼굴에 놀라고, 또 긍정성에 놀란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한 입처럼 말한다.
밝고, 착하고, 긍정적이라고.
과학고에 오기까지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무가 과학고에 들어온 것은 기적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기적은 있다고.
우리 생각 저편에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이 글은 아이의 대학 입시 과정에서 추천서를 부탁드린 선생님께 보낸 에세이를 약간 변형한 것입니다. 더불어 나무는 본명이 아닌 애칭임을 밝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