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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홀-머리 올리기

첫 소풍 갑니다

by 뭐 어때

몇천 개의 공을 쳤을까. 연습장에서 공을 힘으로만 쳐댄 탓인지 내 손은 성할 날이 없었다. 오른손, 왼손 돌아가면서 터지고 갈라지기 일쑤에 굳은살이 박이고, 가뜩이나 예쁘지 않은 내 손은 더 못난이가 되어갔다. 골프백 작은 주머니 안에 밴드가 한 박스씩 들어 있었고 손가락 어딘가에는 늘 밴드가 붙어있었다


" 저 얼마나 연습 열심히 했는지 좀 봐주세요. 손이 다 터져가며 했어요"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은 아이처럼 프로님에게 손에 난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열심히 연습한 건 맞는데 잘못된 방법으로 하신 거예요. 그립 다시 잡아보세요"

이런! 그립부터 다시라니... 운동신경은 좋은 편이라 생각했는데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 늘 제자리였다. 내 운동감각에 문제가 있나를 고민하던 즈음 주변에서는 머리 올리러 가자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연습만 하면 동기부여가 안되고 재미없어 포기하는 경우가 많으니 일단 나가서 잔디를 밟고 놀아봐야 한단다. 노는 건 자신 있는 분야이긴 한데 '머리를 왜 올려? 그게 뭔데?'

생애 첫 라운드 가는 걸 머리 올린다라고 하는 거란다. 참 어색하고 개연성 없어 보이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머리 올린다는 건 여자의 결혼이나 어린 기생의 승진쯤으로 쓰이는 말인데 골프랑 무슨 상관으로 그렇게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도 이 말은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참신하고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은 그렇게 써야겠다.


신랑의 지인부부가 내 머리를 올려주기로 했고 d-day를 기다리며 설레면서도 걱정되는 시간을 보냈다.

감정의 차원에서만 보면 첫 라운드가 결혼하기 전의 두근거림과 비슷해서 머리 올린다는 말을 사용한 건가 싶기도 하다. 결혼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저러나 별로인 표현이다.

신랑에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설명도 열심히 듣고 이것저것 준비물도 샀다. 난생처음 입어보는 골프복부터 시작해서 모자, 로스트볼, 티, 볼마커 등등 무슨 준비물은 그리도 많은 건지, 알아둬야 하는 매너는 또 얼마나 많던지 그냥 복잡하고 어려운 소풍을 떠나는 마음이랄까? 분명 설렘은 있으니 소풍 같기는 한데 마냥 기쁘기만 하지는 않으니 조금은 낯선 소풍이다. '공은 맞출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면 어쩌지' 밤새 뒤척거리다가 날이 밝았다.



첫 라운드 당일. 모든 게 낯설고 신기했던 그날의 동선을 따라가 보자.

차를 타고 골프장 입장 : 클럽하우스 앞에서 차트렁크를 열면 아저씨들이 가방을 내려준다. 차 안에 앉아서 너무 건방진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살짝 드는 어색함이 있다. 이것도 지금은 아주 자연스러워지긴 했다.

체크인 : 선수 도착! 뭐 그런 뜻이다. 로비로 들어가 이름을 말하면 종이를 내어주고 이름, 전화번호를 적으면 확인 후 락카열쇠를 준다 (요즘은 키오스크 체크인도 많아지고 대부분 디지털 잠금장치로 되어있어서 이름과 락카번호가 쓰여있는 종이를 준다.)

신랑 뒤를 졸졸 따라 쭈뼛대고 서서 시키는 대로 인적사항을 적고 열쇠를 받는다.

락카 입장 : 대중목욕탕과 비슷한 샤워시설과 사물함이 있는 곳을 락카라 부른다. 그곳으로 들어가 골프복으로 갈아입는다. 긴장한 탓에 MAN, WOMAN 구별도 못하고 어리바리 대다가 남자락카로 잘못 들어갈 뻔했다. 첫날부터 큰일 날뻔했다. 코로나 이후 골프복을 입고 가는 문화가 생기긴 했지만 그전에는 평상복을 입고 가서 환복 후 플레이를 하는 것이 예의라 했다. 평상복이라지만 좀 갖춰 입어야 하는 느낌이 들긴 했다. 꼰대 마인드가 좀 있는 곳이라 볼 수도 있다.

식당 입장 : 라운드 전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며 아침을 주문해 줬다. 인도 탈리처럼 각자 1인분씩 담아서 나온다. 식사 후 카트에서 마실 커피도 미리 주문해 놓으면 식당 나갈 때 담아서 준비해 준다. 계속 신기함의 연속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호사였음을 이제는 안다

라운드 전 식사는 골프장 근처 해장국이 국룰이고 커피는 집에서 텀블러에 타서 간다.

왜! 골프장 음식은 물, 단무지, 멸치 빼고 다 비싸다.

스타트하우스 : 카트들이 줄을 서 있는, 라운드 나가기 전 일종의 대기하는 장소다. 내 백이 실려있는 카트를 찾아서 라운드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하나씩 꺼내서 정리해 놓는다. (백에 이름을 안 써놔서 한참 헤맸다는 사실-이름 꼭 쓰시라. 골프화도 미리 빼놓으시길. 초보때 꼭 한 번은 하는 실수다.)

'오늘 머리 올리는 사람 있어요. 잘 부탁드려요'라는 말과 함께 캐디에게 인사 후 천지분간 못하는 선수가 있음을 미안해하며 수고할 캐디에게 약간의 인사성 팁을 주기도 한다. 머리 올리는 사람 있는 날 캐디가 엄청 고생하기 때문이다. 눈치가 빠른 편인데도 모든 것이 낯설고 처음인 이 날은 감각이 떨어져 실수연발이다.

첫 홀 티샷 : 티를 꽂고 그 위에 공을 올려야 하는데 손이 부들부들. 이쑤시개 위에 공을 올려놓는 것처럼 공이 자꾸 땅 위로 떨어진다. 공도 못 올리는 애가 공을 치겠다고 나와있다. 의연한 척해보려 하는데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남들에게 들릴 것 같다. 공만 끝까지 본다. 어드레스 - 백스윙 - 팔로우스윙. 배운 대로치고 싶었으나 치고 싶은 대로 쳤다. 아무튼 쳤다. 휴~ 헛스윙은 안 했다. 동반자들이 '굿샷!'을 오버스럽게 외쳐준다. 분명 굿샷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지만 그냥 공 맞춘 게 대견하다는 응원의 외침 같은 것이다.

그늘집 : 18홀 중 절반을 돌면 들르는 곳이다. 중간에 충전도 하고 재정비도 하는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간단한 식사와 술을 마실 수 있는 또 하나의 식당이다. 그늘집이라는 말은 편안한 쉼터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일단 시켜주는 막걸리를 한잔 벌컥 마셨다. 전반 내내 긴장해서 뛰어다닌 탓인지 술은 달고 맛있었다.(지금은 술을 끊어 이런 재미는 없다.)

후반전 : 막걸리 탓인지 시간이 조금 지난 탓인지 전반보다는 덜 긴장한 채로 후반전을 시작했지만 버벅대는 건 똑같다. '18홀은 왜 이리 긴 것일까, 공은 왜 안 뜨는 것일까? 연습할 때는 잘 맞았는데, 이 말도 안 되는 퍼터 거리감은 무엇인가' 수많은 생각을 하고 그렇게 몸도 마음도 왔다 갔다 하며 모두 끝이 났다.

마지막홀 그린 : 모두 다 같이 장갑을 벗고 악수하면서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로 마무리가 된다. 진짜 나 오늘 수고했다.

뒤풀이 : 라운드 후 같이 식사를 하는 것도 골프 예의 중 하나란다. 일단 라운드가 끝나면 배가 고프기도 하고 그날의 운동 이야기를 하면서 수다 떠는 즐거움도 라운드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면 된다. 동반자들은 나에게 처음치고 잘했다고 소질 있다고 칭찬해 주었고 나의 첫 소풍은 비록 서툴렀지만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골프의 8할은 날씨라고 할 만큼 중요한데 라운드 중간에 부슬비가 내렸다. 가뜩이나 정신없고 긴장했는데 비까지 내리다니. 비 오는 날 이사하면 부자 된다는데 비 오는 날 머리 올리면 뭐가 될까? 부자는 모르겠고 아마도 골프에 미쳐서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되지 않나 싶다.


<그때는 모르고 지금은 아는 이야기>

누군가의 머리를 올려준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얼마나 애써야 가능한 일인지 몇 명의 머리를 올려준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또 하나, 소질 있는 것 같다는 동반자들의 칭찬은 '초보자에게 해 주어야 하는 매뉴얼'에 들어있는 친절한 말이었음도.


글을 쓰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머리 올린다는 말 말고 '소풍' 이건 어떨까?

'소풍 가야지' '소풍 가자, 공소풍' 지금은 입에 붙지 않겠지만 이 정도쯤으로 바꿔보는 건 어떨까.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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