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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홀 - 24시간 72홀

Crazy golf

by 뭐 어때

"뭐? 미친 거야?"

"잠도 안 자고 밤 꼴딱 새고 4게임을 친다고?"

"그러다 큰일 나. 정신 차려!"


24시간 동안 4게임을 치는 골프대회에 참가하겠다는 말에 신랑과 주변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니 이제 뭐 놀랍지도 않다.

내가 출산하자마자 공인중개사 학원을 다니겠다고 할 때도 그랬고,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20대에 부동산을 하겠다고 할 때도, 치료가 끝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한라산 등반을 하겠다고 할 때도, 마라톤에 참가한다고 했을 때도 모두 비슷한 반응이었으니 이제 사람들의 그런 반응은 그리 괘념치 않는다. 주변에서는 늘 걱정과 불가능을 먼저 얘기한다. 응원과 격려부터 해 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나를 아끼는 마음이라 생각하면서도 가끔 서운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무언가를 결정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인은 아니니까 괜찮다. 지금까지 내가 계획한 일들에 불가능은 없었다. 어쨌든 다 해냈고 아무런 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난 실패했다는 말을 듣기 싫고 의외로 겁도 많은 편이라 성공할 수 있는 선에서만 결정하는데 남들은 그걸 모르니 반대가 많은가 보다. 시간은 유한하니까 잘 활용해서 나중에 후회 없도록 할 수 있는 일을 가능한 많이 해보고 싶다. 나를 오랜 시간 경험한 사람들은 걱정과 동시에 내 고집을 꺾기 어렵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할 만한 일만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입장에서다.


"하고 싶다고 되는 거 아냐. 유명가수 티켓팅 하는 것보다 빡세."

"더 늙으면 하고 싶어도 못해.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때 해야 돼"

"암튼 되면 간다! 가는 건 허락한 거야. 근데 안될 가능성이 커. 1분 컷 이래"


허락보다는 통보에 가까웠지만 티켓팅이 어렵다는 말을 던져서 일단 신랑을 안심시켰다.

사실 작년에도 가고 싶었는데 의료진도 아니면서 병원 출퇴근하느라 시도할 기회를 놓쳐서 아쉬웠던 차에 올해는 반드시 도전하리라 벼르고 있었다. 강원일보 주최로 평창 알펜시아에서 해마다 열리는 골프대회다.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든다.

크레이지 골프!!!


골프에 미친 사람들만 가능한 대회다. 대회라고 무슨 큰 상금이 걸린 건 아니지만 그저 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해보고 싶었다. 미치는 게 꼭 나쁜가?

'미치면 이기고 지치면 진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쳐서 지고 싶지는 않다.

골프 좋아하는 동생 한 명과 신청날 어떻게 할 건지 계획을 세우고 네이버 시간까지 초단위로 맞춰가며 기다렸다. 32팀 128명만 참가할 수 있고 오픈과 동시에 입금계좌가 뜨면 먼저 입금한 순서로 당첨되는 방식이다.

당일아침 난 휴대폰에 계좌번호만 입력하고 클릭만 하면 이체가 될 수 있도록 은행화면을 띄워놓고 pc는 강원일보 홈페이지에 접속해 놓았다. 같이 가기로 한 동생은 폰과 pc를 동시에 접속해서 계좌번호가 뜨면 내 폰으로 일단 보내주기로 했다. 대단한 임무를 맡은 공작요원들 같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미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당일아침 홈페이지는 과부하가 걸려 원활하게 열리지 않았다. pc 접속이 몰린 탓인지 오히려 모바일로 계좌를 받은 동생이 나에게 보내주고 난 바로 송금을 했다. 4명 참가비를 전부 송금해야 했다. 우린 둘 뿐이었지만 두 명 못 채우겠나 싶어 일단 그 고민은 당첨 이후에 하기로 하고 저질러버렸다.

입금해 놓고 처분을 기다리는데 축하한다는 문자가 왔다. 잠 안 자고 골프 칠 기회에 당첨된 걸 축하한다는 문자다. 남들은 그때도 지금도 이해 못 하겠지만 내가 원했고 원했던 일이 되었다는 생각에 기쁨과 설렘이 몰려왔다.

근데 선수가 문제였다. 신랑은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나처럼 미친 여자 두 명이 더 필요했다. 아는 동생이 지인 한 명, 내가 지인 한 명을 초대해 마침내 미친 여자 4인조를 결성하였다.


24시간 동안 4게임을 하는 방법은 조마다 다르지만 대략 '아침 6시 티오프, 오후 12시 티오프, 저녁 6시 티오프, 밤 12시 티오프'. 이렇게 총 네 번의 경기를 한다. 다섯 시간 경기 후 한 시간 식사 및 휴식을 취하면서 네 번만 하면 된다. '만'이라는 조사가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을 한다는 설렘과 해냈을 때의 성취감 등이 떠올라 가기 전부터 즐거웠다. 잠 안 자고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놀라는 건데 못할 이유가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새벽 여섯 시 티오프를 해야 하니 전날 내려가서 알펜시아 숙소에서 하루를 묵고 출전하기로 했다. 가는 동안에도 우리 넷은 골프얘기에 들떠있었고 가끔 미친 게 맞는 것도 같다면서 웃었다.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사람들처럼 든든하게 먹어둬야 한다며 근처 유명하다는 고깃집 가서 저녁을 먹고 다음날 새벽 출전준비를 했다.


첫 라운드 준비 중



드디어 경기 날 아침. 아침식사하러 들어간 클럽하우스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놀랐다.

여자네명이 신청한 조는 우리밖에 없었다. 역시!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유니크한 매력 있는 일을 좋아한다. 남들이 NO라고 할 때 YES를 외치는. 다시 말하지만 법의 테두리 내에서니까 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대부분은 남성이었고 남, 녀 혼성팀이 몇 팀 있고 여성팀은 우리가 유일했다. 유일한 그 느낌 나쁘지 않다. 아마 '저 여자 들은 뭘까' 내지는 '남편들은 뭐 하는 사람인가' 생각했을 수도 있다. 분명히 밝히지만 골프에 미친 우리 4인조의 남편들은 지극히 정상이고 좋은 사람들이다. 단지 여자들이 고집이 조금 셀뿐이다.

준비해 준 해장국을 먹고 해가 뜨는 모습을 바라보며 첫 경기에 출전했다. 첫 경기 시작 전 살짝 비가 내려 걱정을 했지만 이내 그쳐서 더욱 청명한 날씨를 보여주었다. 체력 배터리 100프로 충전된 상태로 출발해서 첫 경기가 끝나고 두 번째 경기까지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하기 싫은 일은 한 시간만 해도 방전되는데 여전히 쌩쌩한 걸 보면 확실히 즐거운 일은 배터리소모가 적은 것 같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세 번째 경기를 시작한다. 석양이 너무나 아름답게 지고 있었고 야간 라이트가 켜지면서 운치를 더해갔지만 슬슬 배터리가 소모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석양이 지는 세 번째 라운드


세 번째 경기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니 밤 11시쯤 되었고 야식으로 준비해 준 김밥과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드디어 마지막 경기 티샷을 준비한다.

새벽 12시 14분 tee off


이 시간에 새벽을 가르는 티샷 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나에게 커다란 경험 중 하나가 된 마지막 경기 티샷이 시작되었다. 캐디들은 주야교대로 진행했기 때문에 무리는 없었지만 우리들은 연속 4게임에 체력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졸리기도 하고 피곤했지만 수다는 끊이지 않았고 새벽 3시쯤 되니 '여긴 어딘가? 난 누구?' 이런 말풍선이 머리 위로 떠있는 것 같아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몸에 힘이 빠져서인지 마지막 라운드 티샷은 더 멀이 날아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일부는 4라운드 경기를 포기하고 돌아갔다는데 우린 정말 대단한 아줌마들이다.

"우리 진짜 대단하다. 근데 이런 거 해볼 기회가 어디 있겠어. 너무 좋다"

"진짜 모두 수고했어요" "좋은 경험할 수 있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골프 원 없이 쳤다. 하하하"


우리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친 서로를 칭찬했다. 완주 트로피와 기념품을 받으러 들어간 클럽하우스에서 마주친 어젯밤 그 낯선 분들도 눈인사로 서로를 칭찬해 주는 듯했다.


트로피 들고 자랑하러 집으로 출발!!!

우리가 가져간 suv 운전석에는 대리기사님이 타고 계셨다. 잠을 못 자고 4라운드 경기에 참가한 뒤 운전하고 강원도에서 올라오는 건 무리라는 것을 알기에 전날 대리기사를 예약해 놓았다. 이럴 땐 가끔 천재가 아닌가 싶게 머리가 좋다. 새벽 6시에 대리기사는 골프에 미친 여자 4명을 싣고 고속도로를 달려 무사히 집 앞으로 데려다줬다.

우리 집 주차장에 세워놓은 각자의 차로 짐을 옮기며 우리는 또 한 번 웃었다. 해내서 웃었고 용감해서 웃었다. 그렇게 또 남들이 미쳤다고 하는 일을 잘 해낸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여기 어딘가 내가 있다 (사진출처 : 강원일보)


다음엔 또 뭘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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