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화양연화 시리즈]
십칠 년 전, 해외에 나간 창녀들로 인해 대일본국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다면서 국내외의 모든 매춘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유녀나 게이샤라 불리던 이름은 하루 아침에 수치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잠시나마 흔들리는 사람들의 눈빛은 으레 그녀들을 향한 인사치레로 변했다.
에이코는 스물여섯에도 도쿄의 월화 유곽에서 최고의 유녀로 대우받았다. 부드럽거나 매끄럽다 여겨 절로 손이 가는 탐스런 피부는 아니었지만 옅은 화장이 잘 어울리는 서양 여자의 피부와 같은 분위기를 가졌다. 게이샤의 그것보다 훨씬 긴 소매와 치마로도 오비에 조여진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가릴 수 없었다. 게다가 가늘고 긴 목선은 기타가와 우마타로의 우키요에 속 여인의 목덜미와 같았다.
끝없는 욕망이 샘솟는 옹달샘처럼 도쿄 긴자의 습기 찬 돌길은 오비를 당겨 기모노 안을 누비고픈 뭇남성들로 흘러넘쳤다.
관상용으로 아끼고 싶은 보물이 있는 반면 항상 몸에 지니고 싶은 애장품이 다르기 마련이다. 수많은 남성들이 머물다 지났다 해도 에이코에 대한 정복욕은 영원히 샘솟는 옹달샘이었고 지니고픈 애장품이었다.
서양의 카사노바가 사랑하는 마지막 여인을 위해 남겼다는 욕정의 로션을 에이코가 남몰래 사용한다, 라고 수군거렸다. 사람들은 에이코의 마성이 본디 자기 것이 아닐 것이라 수군거리며 폄하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에이코에게 그런 로션은 없었다. 단지 다른 진액이 있었다.
내가 에이코를 만족시킬 때마다 그녀에게서 뿜어나와 나를 칭찬하는 증표가 되었다.
스물여덟, 육군 대위로 궁내청 지원 업무를 명받아 히비야 근처 관사에서 지내기로 자원한 그때를 나는 후회한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궁내청과 육군본부 사이의 서신과 명령을 전달하는게 내 업무였다.
서신과 명령 사이에서 천황 폐하가 모독 받는 것을 나는 빈번하게 엿보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육군 장교라는 허울은 불명예가 되었다. 천황을 위한 황군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결심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렬한 벚꽃처럼 살신하리라 마음먹었다.
작년 2월 26일. 궁내청 앞에서 육군본부 헌병대의 칼에 맞아 등덜미가 마비되었다. 타고 가던 자전거는 쓰러진 내 몸을 묶어버린 올가미처럼 덮쳤다. 그렇게 나는 바보처럼 생포되었다.
뜻을 함께 한 황도파 노나카 시로 대위와 나머지 천사백 명의 병력은 천황 폐하의 친정을 바라며 친위혁명을 일으켰다. 주동한 장교 일부 만이 아름답지 않게 목숨을 잃었다.
첫날 바보같이 궁내청에서 사로잡혔던 나는 쿠데타의 가담 정도가 낮고 주동자들과 친하지 않다는 오류투성이의 내사 정보 덕택에 경징계를 받는 수준에서 그쳤다. 오히려 젊은 육군 장교들의 사기를 꺾지 않으면서 조직을 원만히 아우르겠다는 선전 대상으로 이용당했다.
다케노우치 유타카, 천황 폐하의 어명으로 육군 소좌에 특진한다
육군본부의 발령전보가 히비야 관사로 송달됐다. 그해 겨울 특진으로 지급받은 하사금과 육군에서 건네 준 격려금으로 긴자 하나마치의 고급 유곽인 월화에서 수십 일을 혼자 보냈다.
어차피 허울뿐인 낭인에 불과한 주제라, 허재비처럼 지내라며 쥐어 준 하사금 몇 백 엔을 달갑게 받아든 주제라, 낮 동안 성심으로 근무할 사명감도 없었고 밤 시간에 만나줄 친구도 없었다.
월화에서 가슴이 제일 크다고 소개받은 유녀의 선홍색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며 늙은 게이샤가 뜯는 샤미센 연주를 한갓지게 듣던 날이었다. 방을 잘못 찾아들었다며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용서를 비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까무잡잡한 유녀였다. 오비의 삼단 매듭을 보고 그녀가 유녀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가지런히 정리된 잔머리가 아름다운 말 갈퀴 같았고, 뒤돌아 설 때 잠시 드러낸 목덜미가 기타가와의 그녀와 같았다. 내 몸이 영원히 사랑하여 울며 매달릴 것이라 확신했다. 반드시 그녀를 내 품에 안아야겠다는 욕심만이 내 영혼의 전부였다.
오이란 급의 유녀는 부른다고 해서 곱게 오는 게 아니다. 돈을 준다고 해서 돈의 무게를 느껴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육군본부와 궁내청의 인사들에게 그 유녀를 알선해 달라고 간절히 읍소했다.
일본 내의 누구도 내가 업무에 흥미를 가지고 집중하기를 바라는 이가 없다는 점을 이용했다. 그러자 누구의 사주인지 모르지만 나를 취조했던 헌병대 소좌 하나가 무려 백 엔을 뽀찌로 써가며 내 소원을 들어줬다.
아예 유녀에게 빠져 무위도식하다 예편하기를 바라는 듯했다. 제국과 육군을 위해 죽음을 혓바닥 앞에 두겠다, 라고 그들 앞에 감사의 맹세를 바쳤다. 사타구니가 물릴 때까지 뒹굴다가 조용히 예편하겠습니다, 라고 그들은 받아들였다.
다음해 그러니깐 강제로 예편당한 후 조선에서 쫄딱 망해 거렁뱅이가 된 1937년 봄까지, 나는 그 유녀의 몸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소중한 속살이 두 번이나 헤어져 병원 치료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치료한 그날도 얼른 연고를 닦아내어 유녀의 몸 깊이 달려갔다.
봄이 되어서야 유녀의 이름을 알았다. 에이코.
해군 중위의 가슴에 총검을 꽂아 다다미 넉 장 반을 그의 피를 낭자하게 적셨다는 그 새벽이 되어서야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그리고 착검한 총의 개머리판으로 건너방 이름 모를 게이샤의 품에서 잠든 나를 깨웠던 헌병 두 명이 귀청이 나가도록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제야 에이코의 이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