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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의 에이코?

[제국의 화양연화 시리즈]

by 아메바 라이팅


“여전하구나, 에이코. 정말 날 모르겠어?”


“몰라요. 추워요.”


“제발 한번만 보여줘. 그러면..........”


“귀찮게 구시네. 자 여기요.”


“아하하하.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그냥 가세요.”


볼록한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이 가장자리까지 날카롭게 날을 세운 도끼처럼 내 자존심을 날카롭게 도륙했다.


“열심히 세워 볼게. 잠깐만. 잠깐만.”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가며 얼어 쪼그라든 내 몸을 세워 보려 했지만 몸속으로 말려들어간 그 놈을 달래기 힘들었다.


오하하하!!!



에이코의 웃음에 그 놈은 더더욱 내 몸 안으로 기어들어 갔고 그럴수록 이 시간을 날려 보낼 수 없어 안달나 몸부림치던 나는 더 빠른 손놀림으로 그놈을 달랬다. 나의 애달픈 노력에 보답할 생각도 없이 그 놈은 구멍 끝으로 끈적한 눈물만 흘려냈다.


천황 폐하의 육군 중좌, 조슈 번 출신의 타케노우치 유타카가 경성 뒷골목에서 유녀 출신 하녀를 훔쳐보며 이 짓이나 하고 있다니, 그런데 이보다 더 비참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나는 완전한 불능이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에이코의 단호한 인사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걱정 담긴 그녀의 엄한 얼굴 속에 예전의 사랑스런 눈웃음이 잠시나마 비쳐졌다. 마지막 내게 남은 측은지심이겠지. 생각했다.


그해 겨울 12월까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삶을 살면서 나는 할복이나 자살도 엄두내지 못했다. 노숙을 일삼으며 쇠할 대로 쇠해진 나는 어느 날 조선재활단이라는 단체의 트럭에 시체처럼 실려 갔고, 산 깊은 곳의 평지에 구덩이로 파 놓은 더러운 탕 속에 내던져져 물대포로 씻겨졌다.


알몸으로 씻겨 나오면 군인들이 눈대중으로 훈도시같은 반바지와 조선식 윗도리를 던져 주었고 나와 함께 잡혀온 시체 같던 사람들은 군인들의 호통 속에 힘겹게 옷을 껴입었다. 군인들이 우리 무리들을 사열하면서 두세 무리들로 구분하며 차출했다. 나는 다시 트럭에 실려 밤늦은 시간에 낯익은 풍경 속으로 내팽개쳐졌다.


20사단 집단세탁소 근처의 슬래브 건물에서 먹고 자면서 부대 내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역꾼으로 노예처럼 부려졌다. 노숙할 때와 다를 바 없는 음식이 배식되었고 잠도 하루 네 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차라리 이렇게 살다 죽는 게 더 빨리 죽는 길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내지인의 천성을 가졌구나, 라고 자책하다 고된 노동과 핍박에 이런 생각의 여유마저 포기했다.


12월 어느 날 변소 간을 치우던 내게 일본 관리인이 장교 관사의 변소 동부터 급히 치우라고 지시했다. 관사로 허겁지겁 뛰어 가던 중 몇 달 전 즐겨 찾던 아베의 예전 관사를 지나쳤다.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곁눈으로 흘겨보던 내 눈에서 아베가 나타나는 행운이 생기기를 바랬다. 부질없다 여기고 다시 변소 동으로 뛰어 가기 위해 무릎에 힘을 주며 똥지게를 치켜 올리려는데 7시 방향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티카, 타케노우치 유타카 아닌가



큰 목소리의 쉰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150도 왼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좀 전에 상상으로 바라던 아베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흔들던 손을 내려 입으로 확성기 모양을 내기도 했다가 다시 번쩍 들어 흔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아베다, 아베, 아베. 똥지게를 내려놓으려다 관리자에게 맞아 죽을까 덜컥 겁이 났다. 얼른 다시 챙겨 들고 절름발이처럼 총총걸음으로 뛰어갔다.


수완 좋은 히로시는 일본인 관리자를 불러 적당한 이유를 둘러 대며 적당한 청탁을 했다. 그날부터 나는 장교 관사 청소 담당자로 배치됐다. 아베는 나와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주로 저녁 시간에 청소를 하도록 관리자에게 주문했다. 청소가 늦어진다는 핑계와 소좌님의 배려를 앞세워 슬래브 건물 벽을 우습게 뚫고 들어오는 추운 겨울 밤바람과 새벽 서리를 피할 수 있어 사람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됐다.


아베는 주변이 적막에 쌓인 밤, 고구마 소주를 내게 조용히 따라 주었다. 밤새 고구마 소주 세 병을 비웠고 그는 내가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이내 그가 꺼낸 어느 하녀의 광기어린 연애 이야기가 내 삶을 완전한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안영교라는 조선 하녀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발기되지 않는 내 몸이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나의 여주인, 에이코였다.


아베는 북지나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지 보름도 되지 않았지만 20사단 군인이라면 모를 이가 없는 유명한 에이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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