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조선군 출정전야식
[제국의 화양연화 시리즈]
천황의 군대가 교쿠지쓰키를 앞세워 중국 고토의 주요 도시들을 연이어 점령해 나갔다. 지나 토벌 작전은 승승장구했고 조선군은 관동군과 함께 도쿄 본영의 지휘를 받으며 지나 토벌의 핵심전력이 되었다.
내지에서 충원된 조선군 20사단의 잔여 병력마저 남방 토벌에 투입되는 황은을 신문에서 전해 주었다. 1937년 12월 2일에 인천항을 통해 20사단 중전차 여단과 보병 여단이 상해로 출정한다, 라는 소식이 며칠 전 타츠야에게 전해졌다. 영교인지, 에이코인지 알 수 없는 광녀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한 그날부터 타츠야는 술독에 빠져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조선군과 총독부에서 출정군 장교들을 위한 연회를 용산옥에서 열 것이라는 통보가 테스에게 전달되었고, 남자 주인 없이 치르는 연회는 총독부와 조선군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종로의 K기생집에서 발가벗은 아랫도리만을 내놓고 술에 곯아떨어진 남편을 흔들어 깨운 후 테스는 타츠야를 어르고 달래 용산옥으로 데려왔다.
정신 나간 시체처럼 영혼 없는 육신만이 고개를 끄덕였고 풀려 버린 눈동자를 공중으로 둥둥 띄운 채, 일리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본듯한, 눈만 빼꼼히 남아 유배지에서 돌아온 혁명가의 몰골처럼, 목욕탕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서양식 셔츠 위에 연회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타츠야가 안방 문을 크게 열고 나와 예전처럼 하인들에게 새 단장을 지시했다. 유녀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현금을 내어 주며 화장품과 액세서리를 사도록 내보냈다. 기생들과 게이샤들에게는 새 옷을 마련할 수 있도록 사채업자도 소개해 주었다. 하인들로 모자라는 일손은 동네의 아낙들을 데려다 손을 채웠다.
그러나 테스는 출정 조선군 장교들의 아랫도리를 풀어줄 여자들이 태부족이라는 현실에 골머리를 앓았다. 용산옥이 이 정도로 쪼그라들었는데 주변의 유곽들 사정이야 이루 말할 필요도 없다. 미봉책으로라도 데려올 만한 유녀들조차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나에서 더러운 창녀들을 어쩔 수 없이 품기 전에, 내지에 가까운 조선에서 황군의 장교들이 아랫도리 살풀이를 격조 있게 하도록 봉양해야 한다, 라고 고성을 지르며 훈시할 장교들의 벌거벗은 모습이 벌써부터 몸서리를 일으킨다.
기어이 테스는 영교에게 사정해 단 하룻밤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타츠야와의 관계를 알았다면 사정은커녕 음부를 남김없이 난도질했을 것이다. 며칠째 소식 없는 타츠야를 원망하던 영교는 테스에게서 타츠야를 탈출시킬 좋은 기회라 여겼다.
영교는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 그날 자신의 요염함을 최상으로 끌어올려 타츠야가 영원히 그녀를 잊지 못하게 하리라 결심했다. 자신을 품은 남자가, 아니 자신이 선택한 남자가, 영원히 돋보이도록 자신을 극한의 요염녀로 만들기로 했다.
연회는 1일 저녁 5시부터 열리며 조선 음식을 줄이고 화식을 최대한으로 차리되 공간전개형의 대규모 상차림으로 준비하라는 특별 훈시가 용산옥에 내려왔다. 또한 빨간색 도장 인주로 찍은 ‘必’ 한자의 아래에 손으로 또박또박 쓴 일본어가 눈에 띄었다.
‘장교 일인당 일 여인을 배정하고 출정 전야의 시간제한에 구애받지 말 것’
엄중한 주문이었다. 평시에도 계집과 살맛이 맞지 않는다며 내치거나 하나로 부족해 다른 여자를 더 붙여달라는 주문이 다반사였기에, 죽음을 앞둔 출정 전야에서 벌어질 광란 속 혼란스러움은 테스가 머릿속으로도 상상하기 싫었다.
턱없이 부족한 여자들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테스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내친 하녀들까지 샅샅이 긁어모았다. 하는 수없이 두꺼운 화장으로 분칠하고 아까운 새 옷으로 가려가며 긁어모은 그녀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기어이 밤낮의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어 달력의 숫자가 최대의 크기로 오르더니, 이윽고 가장 낮은 1일에 떨어졌다.
분홍빛 석양이 아름답다 싶었는데 이내 검푸른 땅거미의 잔향만이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무거운 칠흑의 어둠이 잔향마저 깔아 눌렀고 이내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어둠으로 통일되었다.
유녀와 기생은 그녀들이 걸친 옷가지와 틀어 올린 머리 모양으로 구분되었고 노란 몸뚱이의 검은 빡빡머리들은 술에 취해 그녀들과 일 대 일로 뒹굴고 있었다. 바둑판 위에 규칙적으로 놓인 검은 돌과 흰 돌처럼 그녀들과 빡빡머리들이 오묘한 규칙성을 보이며 지상 최악의 난잡한 광경을 그렸다.
단테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체험하게 된 지옥의 아수라장이 이보다 더 추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테가 보았다면 하나님이 아닌 현생 조선에서 일본 황군이 벌이는 지옥의 광경에 두 손 두 발을 다 모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곡을 불태웠을 것이다.
육군 공병 여단 노기 소좌의 곁을 지킨 영교는 스스로를 에이코라고 소개했다. 노기 소좌는 본영 근무 때 육군본부의 배려로 도쿄의 최고급 유녀들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노기가 도쿄에서 겨우 누릴 수 있었던 최고급 유녀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기품과 요염함이 에이코에게서 빛났고 이내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주변의 보병 장교들은 손님으로 격려 차 착석한 공병 장교가 에이코를 차지한 것에 공분하기 시작했다. 에이코와 비교될 수 있는 유녀나 기생이 그날의 용산옥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의 여인들은 ‘에이코와 그녀들’이라는 이군법으로 나누어졌다.
도쿄 본영에서 근무했다는 노기 소좌가 자신과 같은 씨명의 해군 중위가 유곽에서 무참히 살해된 이야기를 떠올렸다. 술과 에이코에 취해 도쿄 본영 근무를 자랑하던 공병 소좌는 자신의 말에 신빙성을 더하고자 노기 해군 중위가 연초에 살해된 이야기를 이력서의 한 토막처럼 떠들었다.
내지의 도쿄 본영에서 살아 본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자랑했다. 에이코는 무심한 남의 이야기를 접하듯 물었다.
"그 유녀는 어떻게 되었나요?"
잠시 당황하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노기 소좌가 말했다. 아마 잡지 못한 것으로 아는데, 아마 어딘가 숨어 지낼 거야, 잡혀단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 라고 성심껏 답했다.
"그 여자 이름이 아마 저와 같은 에이코라고 들었어요."
노기 소좌의 신뢰성에 에이코가 거들어 주었다.
"그래? 같은 에이코란 말이지, 희한하네, 그 친구 그 유녀에게 엄청 매달렸던 모양이야, 칼로 심장을 찔린 채 버려지게."
어리석은 젊은 장교 놈이 벌인 양아치 짓의 결말처럼 공병 소좌는 혼잣말로 그의 집착을 혼내었다. 자신의 분신과 대화하듯 계속해서 술잔을 바라보던 에이코가 마침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에게 말했다.
"정말 사랑받았던 사람은 그 사람 노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