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에 물든 마음

결국은 함께 자라가는 것

by 오후 Lapres midi

언제부터인가 우리집 여행 사진엔 남편이 없다. 남편이 카메라를 들다 보니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이 아이와 나다. 내 폰에서만 가끔 남편이 등장하는데 그것마저도 대부분이 아이를 찍는 남편의 옆 또는 뒷모습이다. 찍사를 자처한 운명이겠지만 그래도 좋은 곳에 갔을 땐 남편도 추억이 될 만한 사진 하나쯤 있어야 될 텐데 지못미 수준의 사진들 뿐이니. 그 흔한 셀카봉도 매번 두고 가서 우리 가족은 셋이 찍은 사진 찾기가 쉽지 않다. 어디서 가족 사진을 요구하면 합성해야 할 판이다.


얼마 전 여행을 갔다. 카페 정원이 핑크뮬리로 가득했다. 이런 타이밍이 흔치 않은데 핑크의 절정이라 우리는 각자의 도구들(DSLR, 미러리스, 스마트폰)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편은 아이를, 아이는 핑크뮬리를, 나는 그 두 사람을. 핑크로 둘러싸인 남편이 폰 안에 포착됐다. 역시 딸과 나를 찍고 있었다. 마침 주변에 사람들도 없고 제대로 원샷이길래 ‘여기 좀 봐바’ 했더니 역시나 엉거주춤, 어색한 포즈로 쳐다본다.

남편을 찍고 있는 내 옆에 있던 아이가 그런다.

“엄마, 아빠는 나중에 사진 보면 맨날 혼자 여행 간 줄 알겠어.”

"왜?"

"맨날 혼자 찍잖아"

“그럼 네가 옆에 가서 서 봐”

“엄마랑 같이 찍어야 하는 거 아냐?”

사진 찍히는 걸 별로(아니 아주 많이!) 좋아하지 않는 나는 아빠는 엄마보다 너랑 같이 찍는 걸 더 좋아한다며 슬며시 아이를 떠밀었다. 분명 싫다고 할 것을 알았기에 두 번도 말 안했는데 왠일인지 아이가 아빠 옆으로 간다.

“어쩔 수 없지. 나라도 같이 찍어 줘야지. 혼자 여행 온 사람 같아서 보기 안좋아”

고학년이 되면서 유독 아빠에겐 곁을 두지도 않고(딸바보 아빠는 매일 매일 상처를 받는 중) 역시 사춘기 아이 답게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해서 사진마다 뒤통수 아니면 심령사진인데, 오늘은 무슨 바람인지 자진해서 아빠 옆에 섰다. 머쓱한 표정으로.

“너 왠일이야? 아빠랑 사진도 찍어주고”

“쓸쓸해 보여서”

외동으로 자란 데다가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더 자기 안으로 몰입되고, 청개구리 짓을 대놓고 하가애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 폭탄 스위치를 켜던 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감동스러운 순간이었다. 남편의 얼굴엔 핑크뮬리보다 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핑크핑크’한 공간에 오니 아이의 맘도 잠시 ‘핑크핑크’해진걸까? 핑크뮬리를 배경으로 한 그들의 패션이 ‘블랙블랙’인 게 좀 아쉬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 러블리한 부녀지간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좀 전의 사진을 프사로 올렸다. 카페를 나오면서 딸은 또다시 블랙 모드로 돌아갔지만, 운전하는 아빠 옆에서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는 아이를 보니 모르는 사이 또 한 뼘 자랐구나 싶었다. 늘 투정만 부리는 것 같고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것 같던 아이는 멈춰 있었던 게 아니라 계속 자라는 중이었다. 그동안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주지 못하고 어른의 눈높이에서만 아이를 바라보려니 모든 게 못마땅했을 수 밖에. 어른은 아이에게 맞춰주지 못하면서 아이가 어른에게 맞춰 주기만 바랬던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어른이고 너는 아이, 나는 엄마고 너는 딸이라는 구분은 모녀지간을 평생 수직적 관계로 평행선을 걷게 할 뿐인데 나는 내 아이에게 선을 긋고 그 선을 지키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찍히는 게 싫은 건 마찬가진데 엄마인 나는 끝끝내 찍히기 싫다고 젤 만만한 아이의 등을 떠밀었고, 결국 아이가 자기보다 아빠에게 더 마음을 쓰기로 한 이 장면이 두고두고 잊혀질 것 같지 않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내가 할 일이 또 하나 생긴 기분이다. 너가 자라는 만큼 엄마도 어른이 될게.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런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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