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 Lapres midi Sep 07. 2023

버르장머리 없는 호르몬

갱년기 호르몬과 사춘기 호르몬은 정녕 다른 것이더냐?


사춘기를 호르문의 문제라고 생각하기로 한 다음부터는 감정 점화의 온도가 좀 내려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영역에서는 호르몬의 문제만으로 보기엔 애매하다. 학교 가면서 배꼽 손하고 90도 허리 숙여 인사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저학년 때는 학교 앞까지 바래다주면 안아주고 돌아서는 너, 엄마가 안 보일 때까지 들어가는 내내 뒤돌아보며 손 흔들어 주던 너. 그런 딸은 진즉에 실종됐다. (이런 실종은 신고도 안받아주니. 참)  사춘기 직전까진 적어도 “갔다 올게”라고는 했는데. 지금은 내가 인사를 해도 휑~ 하니 가버린다. 세상 바쁜 일은 혼자 다 하는 것처럼.       

아침식사를 늘 생략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물어 보면 몹시 시크한 톤으로 대답하기를 “뭐 있는데?” 손과 눈은 여전히 핸드폰에 있다. 

슬슬 올라오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우유에 시리얼, 빵, 포도, 떡. 아니면 밥에 국”이 있다고 메뉴를 읊으면 살짝 고민하는 척하다 늦었다고 그냥 간단다. 그럼 뭐 있냐고 물어보질 말던가. 핸드폰을 할 시간에 밥을 먹던가. 집에 과일밖에 먹을 게 없다고 하면 그럼 왜 물어본거냐며 도리어 짜증을 내길래 만만의 준비를 해놓고 물어본 건데, 이 엄마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을까? 


사실 나도 아침을 잘 안 먹는다. 야행성이라 늦게까지 먹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아침은 생략해도 큰 지장이 없었다.(이러한 삶의 패턴이 갱년기에는 최악이란다) 그래서 딱히 강요는 안 한다. 하지만 성장기 자식에게 안 먹는다고 안 주는 에미는 또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최대한 공손하게 물어본다. 갱년기 엄마가 이렇게까지 노력하면 딸도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줘야는 거 아닐까? 사춘기와 갱년기는 호르몬이 다른가? 오늘은 준비해서 나가는 아이에게 잘 갔다오라고 했다가 대문 닫히는 쾅 소리만 메아리쳐 돌아왔고 어젠 아이방 청소해줬다가 싫은 소리만 잔뜩 들었다. 

“엄마 앞으로 내 방 청소할 때 위치는 제발 바꾸지 마.”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위치를 바꿨어? 난 정리만 했지 바꾼 건 없어. ”

“트레이 두 번째 있었던 것이 세 번째 칸에 있잖아.”

“깨끗이 치워놔서 둘째 칸이든 셋째 칸이든 턱 하니 잘 보이는고만 그게 중요해?”

“나한테는 중요해. 그리고 파우치에 넣어둔 것들 다 공구함에 옮겼드라”

“그건 낚시줄이 풀어져서 여기저기 꼬여 있으니까 그랬지. 쪽가위는 아무데나 두면 위험하니까 공구함에 넣어 놓은 게 잘못이야?”

“응 잘못이야. 엄마가 이렇게 옮겨놓으면 내가 못 찾잖아”

이쯤에서 엄마는 뚜껑이 열려 아무말 대잔치에 들어간다.

“기껏 청소해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나... 참.. 기가 막혀서... 다시는 청소 같은 거 해주나봐라”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너 같으면 좋은 일 해주고도 욕먹으면 하고 싶겠니? 아주 ㅈㄹ을 한다. 배가 불렀어.”

엄마의 호르몬도 만만치 않다. 글로 볼 때는 차이를 못 느낄 수 있겠으나 이쯤 되면 엄마의 목소리가 딸의 목소리보다 몇 배 크기의 데시벨이 된다. 어디 목소리뿐이겠는가. 아이의 볼멘 소리를 엄마는 분노의 스파이크로 내려 꽂는다. 

진짜 갱년기 엄마가 사춘기 아이를 이기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내 안에서 승리의 브이가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 뒤로 입을 닫고 방문을 닫았다. 이긴 게 이긴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호르몬 문제로(딸은 호르몬 과잉, 엄마는 호르몬 결핍이이란다) 거친 대화들이 오가는데 솔직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가 많다. 호르몬의 문제만으로 보기엔 아이의 미래가 지나치게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엄마는 오늘도 아이의 하교 후를 기다린다. 엄마는 기어코 말할 것이다. 아침에 그렇게 인사도 안 하고 가는 건 아니라고. 그건 호르몬이 아니라 네가 문제인 거라고. 어른이 먼저 인사하는데 그런 법은 없다고. 단단히 일러둘 계획이다. 그러면서도 한 쪽에선 상상이 되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는 아이의 한 마디.

“난 못들었는데. 미안.”

그럼 난 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럼 앞으로는 현관 앞에서 배꼽에 손하고 '다녀오십시오' 라고 먼저 인사해줘야겠다. 아주 잘 보이고 잘 들리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