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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애, 그리고 그녀의 남자들

: 김희애 [부부의 세계]

by 윌버와 샬롯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연일 화제다. 막장이긴 하지만 품격이 다르다며 호평 일색이다. 불륜이라는 뻔한 소재지만 자극적인 설정과 빠른 전개 눈길을 끈다.


그러나 이 흥행 8할은 단연 김희애는 배우에 있을 것이다. 그녀의 절대 놓치지 않는 외모만큼이나 믿고 보는 연기력까지 더해졌으니 코로나 일상이라는 지루한 시국에 이 드라마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분하다.


화제를 모으는 그녀의 요즘 행보를 보다 보니 어쩐지 그녀가 출연했던 예전 드라마 속 남자 캐릭터에게서 닮은 점이 보인다. 바로 공감하기 힘든 그들의 찌질함. 그런 존재는 고난을 꿋꿋이 헤쳐나가는 여자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민폐 캐릭터일까. 그녀 옆에 있었던 한심했던 몇몇 캐릭터를 추억을 더듬어 들여다봤다.



1992, MBC <아들과 딸>

드라마 <아들과 딸>은 남아선호 사상의 끝판왕을 보여줬던 드라마다.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시 시청하며 느꼈던 분개함이 또렷이 기억나는 걸 보면 드라마 각인이 대단하다.


여기서 찌질한 캐릭터는 어머니라는 든든한 그늘 아래에서 우유부단하고 유약했던 쌍둥이 남동생 귀남이다. 처음부터 그가 그랬을 남자였는지는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감싸만 돌고 보호해주려는 엄마의 양육 방식이 귀남을 그런 사람으로 자라게 했을 공산도 있어 보인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뼈아픈 말은 진실일까. 드라마에서는 아버지도 분명 편애했을 것 같은데 엄마의 그 도가 지나쳤는지 딸에게 한 엄마 쪽 불합리함만이 뇌리에 박혀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받았던 엄마의 설움이라는 장치가 기실 있었을 테지만.


같은 날 한 배에서 태어났음에도 이름에서 귀남, 후남이라 명백하게 캐릭터 방향이 설정된다. 존재 자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삶의 방향이 규정어 버린 이름. '귀한 아들', '다음에는 또 아들을 낳게 해 주세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쌍둥이는 여자든 남자든 모두게 그리 가운 이름은 아닌 듯하다. 러나 행히 언제나 그렇듯 드라마가 끝날 즈음에는 여주인공을 일과 사랑에 성공시키지만 말이다.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러 가지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후남이. 요즘의 어린 친구들이 지금 이 드라마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딴 세상 이야기처럼 어처구니없어할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더디지만 조금씩은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그래도 믿고 싶으니까.



2012, JTBC <아내의 자격>

아이 교육을 위해 대치동으로 이사 온 평범한 주부. 처음에는 강남의 치열한 교육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인 줄로만 알았다. 혹시나 교육 열풍의 대명사인 그곳 세계를 조금은 엿볼 수 있으려나 하는 심리도 드라마를 보는데 작용했다. 그러나 아이 교육이라는 명제는 그저 장치에 불과했을 뿐 실상은 허울로 뒤집어쓴 여러 인간군상 속에서 그나마 순한 두 남녀의 진정한 사랑 찾기가 그 이야기 중심축이다.


대치동으로 이사 왔기에 그녀의 남편은 속물이 되어 버린 걸까. 아니, 원래도 그런 사람이었겠지만 바뀜은 더욱 인간의 욕망을 불붙게 했을지 모른다. 여기에서 찌질한 캐릭터는 그녀 남편뿐만이 아니었다. 세상 고고한 척 다하던 시댁 식구라는 사람들이 죄다 같은 부류다. 종말에 시댁 쪽 사람들 면면이 파국에 치닫는 지점이 이 드라마에서의 클라이맥스가 아닐까 싶다. 인과응보라는 순리에 맞게 파멸해가는 그들을 보는 것이 시청자 입장에서는 가슴이 뻥 뚫리는 사이다를 맛보게 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음악 때문이다. 올드팝을 삽입해 극의 분위기를 더욱 아련하고 따뜻하게 했다. OST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음악이 흘러 들려와도 그때 그 장면이 불현듯 떠오르니까.

Monkees - Daydream believer
Jane Birkin - Yesterday Yes a Day

2014, JTBC <밀회>

이전까지 김희애의 그녀들은 귀하디 귀한 쌍둥이 동생에게 밀리거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남편에게 위축되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드라마 <밀회>에서의 여자는 음악 재단의 주축을 맡고 있는 능력 있는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대치동에서 특목고 보내기 만큼이나 씁쓸한, 비싼 악기 가지고 음대 가기의 뒷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그러나 역시 여기서도 결코 그녀는 갑의 위치가 아니다. 겉모습만 화려할 뿐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필요에 의해 소모되고 있을 뿐이다. 남편조차도 그녀가 가진 영향력으로 계급 상승을 꿈꿨던 모지리였다.


<밀회>는 유아인과 김희애의 만남이라는 자체로 많은 이슈를 낳았던 드라마다. 피아노 치는 연기가 너무 자연스럽고 뛰어나서 유아인을 다시 보게 한 드라마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 또한 음악의 힘이 매우 컸기에 눈과 귀가 함께 즐거웠다. 피아노나 그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를 결코 나쳐서는 안 된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나오는 피아노 배틀 장면만큼이나 저절로 숨이 멎어지는 연주 장면을 여럿 볼 수 있다.

Schubert - Fantasy in F minor D.940 for piano four hands



2020, JTBC <부부의 세계>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1회부터 파격적이다. 첫회를 본방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 기사는 난리가 났었다. 포털 사이트에 도배가 된 기사만 보더라도 내용은 훤했다. 원작이 영국 드라마라는 사실을 알고 그 줄거리를 찾아봤다.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미리부터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가정과 애틋한 상간녀 모두를 기할 수 없는 남자, 아 펀드로 명품백을 사주는 뻔뻔함을 더해 철딱서니까지 없는 남편이 여기 등장한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뒤통수 맞기 딱 좋 망언을 날린 남편은 당분간 국민 욕받이가 되게 생겼다. 남편 역의 배우는 드라마 '미생'에서 처음 봤음에도 생김이 남달라 유심히 봤던 배우였다. 이번 드라마로 그에게는 아마 인생 최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원작과 얼마나 같고 다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분노가 울컥하던 장면이 둘 있었다. 왜 그녀가 맞아야만 했는가. 상간녀의 부모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불륜을 폭로한다. 폭주하는 그녀였다 하더라도 불륜녀에게 머리채 잡히는 장면은 정말 화가 났다. 상대가 임신을 한 상태라 맞대응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을 하더라도 너무 어이없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녀의 계략이긴 했지만 바람난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장면도 참 보기 불편했다. 능력 없는 남편과 아들을 위해 헌신한 여자의 말로가 는 거라니.


쫓겨난 곳에서 여란듯이 다시 나타나는 남편의 존재가 예고편만 봤을 뿐인데도, 하물며 이미 앞으로의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상태임에도 고구마 한 상자 먹은 듯 답답함이 느껴졌다. 역시 난 남편 있는 여자라 이런 감정이 어쩔 수 없는 건가.


상대의 부모와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불륜을 폭로하는 게 요즘 트렌드인가 보다. 이번 드라마를 보며 예전에 봤던 장나라 주연의 드라마 <VIP>에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상황은 서로 꽤 비슷하지만 깔끔하게 말하고, 단호하게 자리에서 나오던 장나라에 비하면 김희애 경우는 너무나 처절했다.

2019, SBS <VIP>

어찌 보면 김희애가 연기한 극 중 그녀들은 참으로도 사람 보는 눈이 없다. 사람 보는 눈이라는 것은 여자나 남자나 개개인의 능력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인가 보다. 드라마나 현실이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안타깝게도 마주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신은 모두를 완벽하게 만들지 않은 건지 아니면 세상 이치가 원래 좋은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닌 건지.


그래도 김희애는 여전히 주인공 아니겠는가. 찌질한 남자 뒤에 괜찮은 남자도 언제나 등장해준다는 공통점도 발견된다. 역경 뒤에 그녀를 지지해주는 좋은 사람을 반드시 등장시켜 준다. 그러니 우리가 드라마를 마지막 회까지 볼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아들과 딸>에서는 한석규, <아내의 자격>에서는 이성재, <밀회>에서는 유아인이 그런 남자였다. 이번 <부부의 세계>에서도 또 누군가가 그런 이로 대기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재미있게도 <아내의 자격>에서의 이성재 이름과 <부부의 세계>에서의 남편 이름이 '태오'로 서로 같다. 극 중 과거의 불륜남과 현재의 남편 이름이 일치하다니.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평행이론 어쩌고 하며 괜한 억지를 부리고도 싶다.



이렇게 모아보니 그녀 드라마를 꽤나 봤다. 나는 왜 그녀를 예전도 그렇고 요즘에도 늦은 주말 밤마다 보고 있는가.


한 마디로 동경이다. 드라마 속 화려한 캐릭터만큼이나 그녀 자체가 실에서도 일에서나 가정에서나 성공한 여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지적인 미모만큼이나 현실에서도 완벽할 것 같은,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부러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013, tvN <꽃보다 누나>

그녀가 리얼리티 여행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꽤나 반가웠다. 드라마 속 캐릭터가 아닌 오직 날모습의 김희애를 보기 위해 <꽃보다 누나>를 시청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서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그녀를 만났다. 완벽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 아닌 다소 지치고 힘들어하는 평범한 일상 속의 그녀가 보였다. 동질감을 느낀 부분마저 있었는데,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기쁨보다는 어려운 순간이 더 많다는,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힘들다는 엄마로서의 고충을 털어놓을 때였다.


'그녀도 엄마로서는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구나. 그렇게 커리어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희애도 엄마로서는 똑같구나.'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인 것을 그녀라고 별 수 있겠는가.


어쩌면 당연하고 뻔한 인데도 드라마 속 그녀를 때마다 잊게 된다. 그녀의 훌륭한 연기에 특급 칭찬을 보낼 뿐, 그것은 어쩔 수 없다.


2020, SBS <하이에나>

갈등이 없으면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사건이 있어야 비로소 이야기는 이어지니까. 여기 김희애가 나오지 않던 다른 드라마 얘기를 하려 한다. 좌충우돌이 있긴 했지만 함께 성장하는 여자와 남자가 등장한다. 김희애의 그녀들은 여기 하이에나처럼 처음부터 소울메이트를 만나기 어려웠던 걸까. 언제나 태생은 똘똘한 여성이었지만 찌질한 남자에게 고통받는 김희애의 그녀들이 이제는 사람 보는 혜안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겪을 만큼 겪지 않았는가. 학습은 되어야지.


2007, SBS <내 남자의 여자>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변화를 피하지 않는 배우니까. 파격으로 치자면 과감한 헤어스타일로 등장했던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부터 막은 시작됐다. 그보다 더한 설정이 그녀에게 온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왜냐고? 김희애니까!


이렇게 주욱 그녀에 대해 써보니 꽤나 그녀를 나는 좋아하는 것 같다. 파격과 변화, 그리고 도전을 앞으로도 그녀에게 기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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