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를 읽었다. 먼저 이 작품을 본 아이는 이 이야기가 픽션이냐고 내게 물었다. 작가 아버지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쓰인 이야기라고 난 설명해줬다. 그렇다면 그 아버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아이는 말했다. 나치 치하에서 죽을 고비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살아남는 영화 같은 이야기가 실제 일이라고 아이는 믿기지 않았나 보다.
솔직히 나도 그랬다. 흑백의 그림단순한 만화라지만 죽음의 공포가 너무나 또렷하게 내게 다가왔다. 그 당시 유대인의 희생이 어땠는지 알고는 있지만 한 개인이 실제로 겪은 모습에서 더욱 여실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바로 눈 앞에서 가족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참담함, 내 목숨 하나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시절이었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던 때다.
만화 <쥐>만큼이나 먹먹해지게 하는 그림책 하나를 오늘 보았다. 책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대의 비극은 천사 같은 영웅을 낳게 하나 보다.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과 끝까지 함께하던 어린이 인권의 주창자 '야누슈 코르착'을 만날 수 있었다.
박사님도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날 거잖아요.
너희가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니? 여기가 내 집인데.
다시 버려지지 않으리란 믿음, 그가 늘 자신들을 지켜 주리란 믿음이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한때 촉망받는 젊은 의사였습니다.
"신이여. 제 작은 힘이 당신의 어린 생명들을 구하는 데 쓰이게 하소서." 마침내 그는 의사의 길을 버리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폴란드에서 야누슈 코르착은 전도유망한 의사의 길을 버리고 고아원을 맡아 어린이들을 보살피게 된다. 오랜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갈 곳 없는 고아들을 그는 자식처럼 사랑하고 지킨다. 고아원에 '어린이공화국'을 세워 아이들 스스로 존중하며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돕는다. 스스로 깨치고 배우는 힘은 강했다. 그는 아이는 인간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하고 대우했다. 그렇기에 다시 버려질 거라는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어린이들은 믿음이 굳건한 아이들로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상황은 점점 좋지 않아 진다. 2년 간 게토에 갇히게 된 고아원의 아이들은 먹을 것도 부족하게 되며 힘든 시절을 보내게 되지만 야누슈 코르착은 거리에 구걸을 하면서까지도 아이들을 건사한다. 그러나 2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은 결국 가스실로 가는 기차에 태우라는 독일군의 이송 명령을 받는다.
자, 지금부터 여름휴가를 가는 거야. 가다가 길을 잃거나 흩어지지 않도록 줄을 잘 맞추어서 가도록 하자.
야누슈 코르착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깨끗한 옷을 입히고 당당하고 질서 있게 기차역으로 함께 향했다.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의 게임처럼 아들에게 연극하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생각났다.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아니? 네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사람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단다.
야누슈 코르착은 끝까지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처음의 말을 끝까지 지켰다. 내 아이들을 어떻게 버릴 수 있냐며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했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잔인한 아동 학대가 현재에도 너무나 빈번하게 귀에 들린다. 지금은 전쟁통도 아니고 먹을 것이 없는 시대도 아닌데 왜 그런 끔찍한 뉴스를 우리는 끊임없이 봐야만 할까.
혼자서는 200명의 아이를 지킬 수는 없을지라도 사회 곳곳에 내 가까운 이웃의 아이를 귀하게 여기고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는 한 명 한 명의 야누슈 코르착이 우리는 되어야 한다. 죽음으로 행진하는 200명의 아이를 숨죽여 바라보며 흐느끼던 방관자가 우리는 더 이상 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라도 '믿음'이라는 단단한 울타리를 아이에게 둘러준다면 아이는 바르게 자랄 수 있다는 증거를 야누슈 코르착은 보여줬다. 어른이 되었다고 아이를 미성숙한 자아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는 어른의 감정의 배설구가 아니다. 당신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야누슈 코르착의 말을 깊게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