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났단다. 장마 기간은 동남아 날씨처럼 느껴졌다. 엄청나게 덥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흐려져 소나기가 뿌려진다. 어찌나 그 위세가 대단했던지 잠깐이었지만 폭풍이 지나간 듯 여린 나뭇가지가 많이 부러지기도 했다. 요상한 날씨에 정신이 없다가 이것이 모두 이상기후라는 결론에 다다르면 마음은 다시 어두워진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에 탈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타자마자 심상치 않았다. 평소처럼 일기예보를 보고 길을 나선 터였다. 돌아올 쯤에 비 소식은 없었다. 우산 없이 비 맞기를 얼마나 나는 싫어하는 사람이던가. 하늘이 조금이라도 흐리면 예보에 비 소식이 없더라도 우산을 항상 지니고 외출하는 나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머피의 법칙처럼 준비되지 않았을 때 일은 꼭 벌어진다. 점점 비는 더 세차졌다. 버스가 집에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은 조여 온다. 버스를 내리고도 10분 정도는 더 걸어야 집인데, 어떡하지? 이 정도 비는 맞을 수가 없는데. 버스에 내리고 후다닥 정류장 앞에 있는 식당으로 냅다 뛰어들어갔다. 잠시 비를 피할 요량이었다. 가게 사람에게 양해는 구했지만 눈치는 좀 보였다. 비는 여전히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아들, 엄마 좀 데리러 와줄래?"
집에 있는 아이가 생각났다. 우산을 주러 아이 학교 앞에서 기다려만 봤지 내가 그런 부탁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아이는 흔쾌한 목소리는 아니어도 덤덤히 내 위치를 물었다.
아들을 기다리는 몇 분이 참 길기도 했다. 드디어 저기 건널목을 건너는 내 아이가 보인다. 휴우, 이제 됐다. 우산 하나 가지고 별의별 감정이 다 들었다. 어느새 나보다 키가 훌쩍 큰 아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나보다 한 발 앞서 가는 아들의 등이 그렇게 넓어 보일 수가. 아들은 내게 오면서 비바람에 이미 바짓단과 신발이 다 젖어 있었다.
여기 그림책 주인공도 비를 마주한다. 그래도 시작은 나보다는 사정이 나아 보인다. 여기도 장마철인지 등장인물 모두가 우산을 갖고 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가로수도 기우뚱거린다. 비는 그렇게 예고를 보내고 있었다. '나 이제 시작할 거야. 각오 단단히 해' 하고 마치 선전포고를 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기세 등등하게 우산을 펴지만 비 또한 만만치 않았나 보다. 우산은 뒤집히고 지나가는 자동차 빗물을 다 맞고 거기다 우산대는 또 부러진다. 비를 피하기 위해 여자는 달리기 시작하지만 그렇지, 불행은 한꺼번에 몰아서 온다고 했던가. 여자는 길 한복판에서 엎어지고야 만다. 비를 피해 있던 거리의 사람들은 그녀를 안타깝게 쳐다볼 뿐이다. 부끄러움은 당연히 넘어져 있는 여자의 몫.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아마도 아무렇지 않게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려가는 스피드!
어쩌자고 그녀는 이날 치마를 입고 나왔을까. 훌렁 올라가는 치마를 부여잡고 그녀는 아침에 골라 입은 자신의 코디를 분명 후회했으리라. 머리칼을 묶지 않고 찰랑 긴 생머리를 하고 나왔던 이유는 빨개질 얼굴을 가리기 위한 탁월한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을까? 우산대가 부러졌을 때의 민망한 미소, 급기야 넘어지고 얼핏 스치는 그녀의 표정은 또 어떤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그녀의 얼굴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어서 달려가서 그녀를 일으켜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한다. 하지만 그림책 속 주변인들처럼 그냥 모른 척하는 게 그녀를 돕는 것일까?민망함을 감추기에 타인의 친절이 나은 건지 아니면 외면이 나은 건지 잠시 고민케 한다.
그림책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겪어봤을 비 오는 어느 날의 풍경을 굵직하고 시원한 수채 그림으로 표현했다. 주인공이 겪는 그 모든 일은 어쩌면 그 상황을 맞이한 과거의 나를 만나게 한다. 맞아, 나도 그런 적 있었는데.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 창피함을 그림책은 다시 소환하여 우리를 미소 짓게 한다.
시원하게 비가 오는 날이면 당신은 무슨 생각이 나는지? 난 오래된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진 켈리가 우산 들고 빗속 밤거리에서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이, 내가 생각나서 보낸다고 친구가 들려준 이승훈의 노래 '비 오는 거리'가, 대학 때 학교에 가려는데 마을버스가 폭우를 뚫고 가까스로 지하철역에 도착했는데 역이 물에 잠겨 전철을 탈 수 없어 다시 물에 빠진 생쥐가 돼서 집에 돌아온 날이, 그렇게 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숨 돌리고 있는데 과 동기가 자기 동생이 사고를 당했다고 치료비로 돈 좀 보내달라는 전화를 받은 일이, 왠지 미심쩍어 주진 않았지만 그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에 괜스레 마음이 이상했던 날이 난 떠오른다. 과동기 일화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생을 꼬드긴 보이스피싱의 일종이 아니었나 싶다.
비 오는 날이면 난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중에 그래도 내가 지금껏 비 오는 날을 그나마 좋아하는 이유는 고등학교 비 오는 어느 날 때문일 것이다.
식구가 많던 때 집에 개인별로 우산이 하나씩 있지 못했다. 멀쩡하든 아니든 우산은 제각각이었고 비닐우산도 지금처럼 튼튼하지도 않은 시절이다. 아침부터 비가 오면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우산을 들고 학교 가기가 쉽지 않았다. 느닷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비를 쫄딱 맞고 집에 온 날도 수두룩하다. 그런 날은 아무도 비 맞는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보지 않기를 바라면서 난 서둘러 집으로 뛰어갔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순간이동을 그렇게 절실히 바란 적이 또 있었을까. 누구도 마중 나오지 않는 그 처량한 기분을 알기에 혹은 또다시 그런 기분이 들고 싶지 않기에 난 지금까지도 일기예보를 아침마다 챙겨보고 우산을 꼼꼼히 챙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아침에는 멀쩡했지만 하교하는 때에 비가 조금씩 오고 있었나 보다. 난 터덜터덜 여느 때처럼 비를 맞으며 교문을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다른 날이었다. 교문에서 조금 떨어진 오른편에 오빠가 서 있었다. 아마 오빠는 그때 대학생이었을 것이다. 오빠 손에는 우산 하나가 들려 있었다. 빨간 새우산. 나만의 우산이었다.
우리는 평소 서로 덤덤히 지내던 네 살 터울의 현실 남매였는데 그날 오빠가 무슨 생각으로 학교 앞까지 왔는지, 둘이 집에 가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동생을 위해 빨간 우산을 손수 사서 학교 앞에 서 있던 오빠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또렷하다. 지금은 없지만 손잡이는 길쭉하고 고급지게 일자 나무로 되어 있었고 검은색으로 얇은 체크무늬 패턴이 있던 예쁜 빨간 우산 또한 여전히 생생하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까 아름다운 그녀 오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 그래 그래서 다들 살아가나 봐
그래서 그런지 김건모 노래 '빨간 우산'이 내겐 아주 남다른 노래가 되었다. 노랫말처럼 아름다운 그녀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오빠와 내 빨간 우산을 생각나게 하니까.내 최초의 우산. 그날 이후 비 오는 날이 그리 싫지 않았다. 내게는 나만의 빨간 우산이 있었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천천히 걸어가자 여름 소나기 시원하게 내린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 '강철부대'에서 한 출연자는 격투하다 흙탕물을 마시고 "믹스 커피 맛있다!"라고 말해 험악했던 좌중 분위기를 일순간 유쾌하게 전환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림책 주인공의 의기소침도 딱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망한 거 이제부터는 즐기자는 마인드로 전환한다.생각을 바꾸니 표정도 밝아졌다. 부러진 우산을 들고 씩씩하게 빗속을 척척 걸어간다. 여태 볼 수 없었던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다른 때보다 좀 일렀던 장마, 그러고 나서 폭염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나날이다. 작년, 비만 오던 여름을 보낼 때는 햇빛이 쨍한 여름이 퍽이나 그리웠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는 참으로 여름답다. 너무나 이른 더위와 열대야가 고생스럽긴 하지만 우리에게 사계절이 있어 얼마나 감사한가.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서, 비가 내려서, 단풍이 들어서, 눈이 와서. 뚜렷했던 그 모든 것들이 점점 희미해져 가 안타깝지만 그 계절들로 행복했거나 슬펐던 기억들을 우리는 가슴속에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뜨거운 여름 오후, 우리 집 베란다 밖에서 마스크를 쓰고 배드민턴을 치는 여자아이 둘이 보인다. 그 아이들은 그림책 주인공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엄청 덥다 에라 모르겠다! 우리 그래도 놀아볼까!
그래도 더워도 너무 덥다. 쨍한 여름을 기다렸다 해도 지금은 소나기 한바탕 시원하게 내려줬으면 바랄 게 없겠다. 부디 느닷없이 비를 맞게 될 행인은 없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