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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더 이상 배우고 싶지 않아

: 나는 [ ] 배웁니다

by 윌버와 샬롯

"요즘 어떻게 지내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일상적으로 하는 인사말이다. 궁금하지는 않지만 그저 나누는 의례적인 인사일 수도 있고 안 본 사이에 신변의 변화가 혹시 있을까 하는 호기심의 첫마디일 수도 있다.


이제는 아이도 어리지 않으니 집에 있던 주변 엄마들이 하나둘씩 경제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세세히 그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전업주부라는 것. 남편 연봉이 많지도 특별히 넉넉하지도 않으면서 집에 그냥 있는다는 게 언젠가부터는 능력 없음을 대변하는 것도 같았다. 가사 노동의 폄훼에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스스로가 그런 나를 인정 못하는 자격지심. 당장 나가서 일해야만 생활이 되는 형편은 아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아이를 키우다 사회로 나가는 엄마들이 경제적 이유 하나만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을 하면서도 살림까지 똑 부러지는 사람, 과한 열정이라 치부하다가도 속내는 그들이 부러웠음을 고백한다.


"뭐 저야 항상 똑같죠."


달라진 일상 얘기를 상대방은 내게 기대했을 수도 있지만 항상 똑같다는 말로 내 근황을 간단히 전한다. 뭔가를 하고 있는 그녀가 변함없는 내게 실망하는 건 아닌지 엉뚱한 생각마저 가끔 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이 그림책은 제목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계속 무언가를 배워야만 한다는 강박을 또 부추기는 책일까. 성장을 강요하는 세태에 난 지쳤다. 항상 똑같다며 자조 섞인 말을 하는 나는 또 뭐를 배워야 할까? 그러지 않고 있다면 내 삶은 실패한 걸까?


나는 젓가락으로 먹는 법을 배웁니다.
나는 꽃 기르는 법을 배웁니다.
피에르는 무술을 배워요. 뤼시는 춤을 배우고요. 나는 수영을 배웁니다.


그림책은 뻔한 얘기만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거창한 무엇을 배우고 있다고 쓰여 있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먹는 법, 꽃 기르는 법, 수영하는 법, 자전거 배우기, 외국어 배우기, 뜨개질 배우기 등 어떤 특별한 것들이 아니었다. 아니다. 어쩌면 그것들은 특별한 일일 수 있겠다. 젓가락질이나 꽃을 기르는 것쯤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러나 난 물이 무서워 수영을 못하고, 자전거 타기도 아직 서툴고, 외국에서 잠시 혼자 여행할 때도 맥도널드에서 수줍게 햄버거만 주문해 끼니를 때울 정도로 영어도 변변치 않다.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은 매우 굼뜨니 뜨개질 배우기는 엄청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배움이란 이처럼 상대적인 것이다.


그림책은 반전으로 마무리된다. 알록달록 단순한 그림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화자의 연령을 당연하게 추측하게 한다. 나도 속았다. 그것이 아님을 뒤엎어 처음부터 그림책으로 다시 보게 한다.


나이가 뭐가 중요할까. 어린아이든, 청년이든, 노인이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다. 어느 때이든 몰입하고 즐거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고미 타로의 <모두에게 배웠어>에서는 아이가 자연과 동물을 통해 배우는 기쁨을 얘기한다. 사노 요코의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에서는 제 나이를 벗고 다섯 살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스스로 가뒀던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가는 99세 귀여운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


나이는 상관없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하나? 국가에서도 평생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여러 기관에서는 그에 발맞춰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기도 하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도서관 수업을 많이 들었다. 보통 육아와 관련됐거나 문화 예술 강의들이었다. 혼자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쓰고 싶었다. 아이를 키우지만 그저 그런 아줌마가 되기는 싫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는 그런 마음들이 시들해졌다. 이제는 그만 배움을 멈추고 자신을 표현하라는 철학자 최진석의 강연을 듣고나서부터였을 것이다. 무엇이 되려고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뿐인 수동적인 배움에 변화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입속에서 맴돌던 상념을 제대로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의 99세 할머니처럼 '이러니까 못해'라고 했던 것들을 그냥 하기 시작했다.


어떤 목적에 의한 배움에 난 여전히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그저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는 행위들. 어떤 것을 바라지 않고 하는 행위들. 나는 그것들을 사부작사부작 그냥 한다. 한동안 보지 않던 그림책을 다시 펼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신문에 좋아하는 칼럼이 있으면 스크랩하고 내 생각을 정리했. 신문이든 책이든 영화든 어디서건 맘에 드는 구절이 보이면 모아뒀다. 누가 보든 안보든 그냥 나만의 글을 썼다. 내 생각을 그렇게 도망가지 않게 붙잡아 뒀다.


뭘 한다고 떠벌리지는 않는다. 나를 아는 사람이 내 글을 읽는 것이 아직은 불편하다. 글에서는 솔직한 나도 있지만 보기 좋게 포장된 나도 있다. 누군가가 그걸 눈치챌까 조심스럽기도 하다. 책을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다는 요즘, 글 쓰는 게 뭐 그리 큰 대수겠는가. 그러나 항상 똑같다고 답하는 인사말에 이제는 좀 힘을 줘 말하고 싶다. 똑같지만 난 똑같지 않다고. 돈을 벌고 자격증이나 학위 같은 보이는 성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지금 충분히 괜찮다고.


날마다 배우며 살아요.
그래서 행복합니다.


배움이 싫다 했지만 난 어느 누구보다도 배우며 성장함을 갈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새끼손가락으로 살짝 간만 봤을 뿐인데 좌절하면 그저 세상 탓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아직 스스로를 가혹하게 비판할 자신이 없다. 만약 그러기 시작하면 한없이 더 난 작아질 것만 같으니까. 그러면 난 정말 너무 힘들 것 같으니까.


그래서 나라도 나를 쓰다듬어 준다. 괜찮다, 잘한다, 최선을 다했다, 헛되지 않았다고 되뇐다. 책이 삶의 모든 해답을 준 것은 아니지만, 책은 날 외롭지 않게 했다. 다시 시작하게 했다. 꿈을 꾸게 했다. 그리고 글을 쓰게 했다. 한 편씩 글이 완성될 때마다 조금은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난 30년 전, 20년 전, 10년 전, 작년의 내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행복한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행복은 연속성이 아니라 순간적인 상태다. 난 순간순간 행복하기 위해 고민하고 애쓴다. 뭘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를 때가 많다. 지나고 보면 후회되는 날도 수두룩하다. 또 넘어지고 울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난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 또 거기서 무언가를 배우겠. 오늘도 그렇게 하루를 살아낸다. 그렇게 버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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