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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구 삼촌은 어디에 있을까?

: 용구 삼촌

by 윌버와 샬롯

예전에는 한 집에 식구가 많았다.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뿐이랴. 할아버지 할머니에 결혼하지 않은 삼촌 고모까지 북적이며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살았다. 그리 고릿적 얘기도 아니다.


나만의 방이 있기가 만무한 시절이었다. 집에서 혼자 사색할 공간을 탐하기란 언감생심이었지만 다양한 연령, 각각의 역할과 개성이 다른 사람들을 한 가정에서 아이는 만날 수 있었다. 그때의 집은 정말 작은 사회와도 같았다.


집뿐만이 아니었다. 옆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오늘 저녁 반찬은 무엇인지 빤히 알 정도로 드라마 '응답하라'의 쌍문동 주민이 아니었더라도 이웃 간의 정도 지금보다야 훨씬 남달랐다. 밥때가 되면 '누구야 밥 먹어라' 할 때까지 아무것도 없는 마을 공터에서 동네 꼬마들과 숨바꼭질하던 것이 내 유아 시절 한 꼭지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이는 그 작은 사회에서 엄마 아빠가 주는 조금은 부족한 사랑 이외의 다른 관심과 보살핌을 서로 주고받으며 자라났다.


그림책 속 화자인 '나'도 그런 시절에 산 아이 같다. 어머니, 아버지, 나, 누나, 할머니 그리고 용구 삼촌 이렇게 여섯 식구가 함께 산다. 용구 삼촌은 좀 특별한 사람이다. 삼촌은 태어날 때부터 아팠던 건지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다섯 살배기도 할 수 있는 얼음과자 사 먹을 줄도 몰랐다. 그런 삼촌이 어느 날 늦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용구 삼촌이 소를 먹이러 갔는데 해질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얘가 왜 아직도 오지 않을까?"
그런데 누렁이는 길게 고삐를 땅바닥에 끌면서 혼자만 걸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삼촌이 소를 데리고 간다기보다 누렁이가 삼촌을 데리고 간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삼촌이 누렁이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 누렁이가 앞장서서 가고 삼촌은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올여름을 누렁이는 그렇게 탈 없이 삼촌을 데리고 산에 갔다가 탈 없이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모든 게 서툴던 삼촌이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이 산으로 가 소를 뜯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딸랑 소만 집으로 돌아왔으니 식구들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못골 개울 둑길로 아버지와 경희 누나와 내가 함께 삼촌을 찾아 나섰습니다.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용구 삼촌은 이렇게 모든 게 서툴렀습니다.
그런 삼촌이 언제부터인지 누렁이를 데리고 못골 산으로 풀을 뜯기러 다니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누나와 나는 이렇게 삼촌을 부르며 두 길이나 높은 못둑으로 올라갔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 누나와 함께 삼촌을 찾으러 나섰지만 보이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아버지는 동네 아저씨들을 불러 모아 도움을 청한다. 일이 커져 버렸다. 어둑했던 마을은 사람들 손전등으로 훤해졌다. 설마 개울에 빠진 것이 아닐까 하고 돌아오지 않는 삼촌 생각으로 두 아이는 울먹이기 시작한다. 안보이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삼촌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떠올랐을 것이다. 알고 보니 용구 삼촌은 소만 뜯길 줄 아는 것이 아니었다. 삼촌은 깨끗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졌고, 조카들에게 먼저 맛있는 것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웃는 삼촌이었다.


'삼촌, 삼촌, 제발 어서 나타나 줘.
살아 있어 줘.'


입속으로 되뇌는 살아만 있어달라는 조카들의 간절한 기도. 사람이 급박한 상황에 다다를 때, 그 순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런 때는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어린 내 아이가 갑자기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 엄마는 순간적으로 앞이 캄캄해지고 심장이 멎는다. 종교가 없더라도 '제발 하느님 부처님' 하고 이 세상 모든 신을 찾아 부른다.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게만 해준다면 신이 바라는 그 무엇이라도 기꺼이 줄 수 있을 것처럼 간절히 빈다. 용구 삼촌 가족 모두가 딱 그 심정이었으리라.


아버지가 손전등으로 못물 위로 불을 비추었습니다.


"용구, 여기 있다!"


나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용구 삼촌은 무사했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기도가 한마음으로 모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은 어쩐 일로 삼촌은 숲에서 잠이 든 걸까? 미소 지으며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삼촌 모습은 애태우던 사람들마저 고요하게 만들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하며 마음을 졸이다가 막상 안전을 확인하고 나면 속과 달리 냅다 등짝을 때리며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는 엄마처럼 조카는 삼촌을 원망스럽게 흔들어 깨운다.


좀 이상한 것이 흔들고 뺨에 얼굴을 비벼도 삼촌이 눈을 떠 일어나는 장면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촌과 같이 있던 토끼만 놀라서 달아날 뿐이었다. 당연히 그가 살아있다는 뉘앙스의 결론이지만 난 왜 자꾸 슬픈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정말 용구 삼촌은 살아 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아마도 작가 권정생의 작품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느 수 있는 먹먹 정서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운은 덜 하겠지만 용구 삼촌이 사람들 앞에서 부스스 일어나 해맑게 웃는 장면으로 끝났다면 확실하게 내 마음이 좀 편했을 것 같다.


우리가 보기엔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인지 몰라도, 모두가 함께 어울려 지내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통일, 서로 나누고 아끼면서 만들어 가는 삶의 가치,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보살피고 자연의 질서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선생님의 동화를 이끌어 가는 힘입니다.


예전처럼 집은 대가족이 아니어서 요즘 아이들은 각자의 방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엄마 아빠 두 어른만의 관심으로는 예전의 아이들 만큼 다양한 가치를 체득하기란 쉽지 않다. 같은 아파트, 비슷한 라이프 스타일끼리 모여 사는 단일 가족의 집합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십상이다.


아이는 삼촌을 걱정하다가 애달파하다가 원망하다가 안도한다. 그런 마음은 세상을 크게 품을 수 있는 아이로 자라게 할 것이다. 용구 삼촌 정말 소만 뜯길 줄 아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도 허투루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이미지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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