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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는 옛이야기일 뿐, 오해하지 말자

: 뒹굴뒹굴 총각이 꼰 새끼 서 발

by 윌버와 샬롯

어디서 익히 들어봤음직한 옛이야기 한 편의 그림책이다. 근데 제목에서 언뜻 감이 오지 않는 단어 하나가 보였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단위의 옛 표기, 모르면 찾아보면 된다.

발[발ː] : 의존명사 길이의 단위. 한 발은 두 팔을 양옆으로 펴서 벌렸을 때 한쪽 손끝에서 다른 쪽 손끝까지의 길이이다.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찾아보니 생각보다 긴 길이다. 직접 두 팔을 벌려 재보니 1미터 45센티미터가량 되었다. 거기에 서 발이라 했다. '서'는 '셋'을 의미하니 서 발은 4미터가 좀 넘는 길이다. 만약 팔이 더 긴 사람라면 5미터 가까이도 될 수 있겠다. 그렇게 보자면 그림책에서 보이는 서 발의 그림이 조금은 짧지 않나 생각이 든다. 난처했던 동이 장수가 동이를 엮으려 쓰기에도 그림 속에서 보인 것보다는 새끼 길이가 4미터는 넘어야 적당한 길이지 싶다.


이 그림책 이야기는 집에서 쫓겨난 게으른 총각의 엉뚱한 성공담이라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옛이야기를 읽고 이리 반감이 드는 작품은 처음 같다. 아무래도 이 세상 여자들이 모두 애달파 보여 그럴까. 딸을 키우는 엄마의 시각이 많이 들어가 그런가. 너무나 쉽게 아무렇지 않은 듯 여자를 거래하는 장면들이 난 참으로 보기가 불편했다. 해피엔딩으로 끝날지언정 아이를 납치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여느 영화들을 보는 것처럼 개운치 않았다.


"뒹굴뒹굴하지만 말고 새끼라도 꼬아라!"


예나 지금이나 부모 마음은 똑같은가 보다. 다 큰 자식이 뒹굴뒹굴하고 있으면 속이 뒤집어지는 것 말이다. 뭐라도 했으면 좋겠어서 어머니는 총각에게 새끼라도 꼬라고 지푸라기 한 짐을 준다. 그 정도 지푸라기라면 얼마큼의 새끼를 꼴 수 있을까? 도시에서 나고 시골에서 자란 남편에게 물어봤다.


"혹시 어릴 때 지푸라기 꼬아봤어?"

"그럼."


그냥 물어본 건데 도시에서 나고 자란 부인은 새삼 놀랐다. '정말 이 사람 옛날 사람이었군.' 지푸라기 꼬아서 새끼줄을 만들면 시골에서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고 남편은 말했다. 순간 머릿속에서 지푸라기가 쓰이는 여러 그림이 그려졌다. 지푸라기로 짚신도 만들고 쌀포대도 만들고 초가집 지붕도 이을 수 있다.


새끼를 꼬아 본 전력이 있는 남편과 함께 어림 잡아보건대 한 짐 정도의 지푸라기로 적어도 10미터 이상은 꼴 수 있을 거라 결론지었다. 그것도 한 시간이면 족히 끝날 수 있는 일이라고 남편은 옆에서 호기롭게 얘기했다. 어렸을 적에 해본 일이니 약간의 과장과 오차가 있겠지만 다 큰 총각이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새끼 서 발을 꼬았다는 건 엄마 된 입장으로 총각을 내쫓은 어머니가 아예 이해 못할 일도 아닌 것 같다. 나 같아도 등짝 스매싱이다. 그러나 친하게 지내는 동네 언니가 그랬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이한테 '나가'라는 말만은 절대 하지 말라고, 정말 나가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선 어머니에게 내쫓기고 나서야 게으른 총각은 어떤 일이라도 생길 수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이다음에 만나요."


'어머니 잘못했어요'하고 싹싹 비는 것도 아니고 뒹굴뒹굴 신나게 집을 나가는 총각. 쫓겨나가는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지 않나. 어찌 그리 해맑게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총각 어머니 속은 열불이 났을 게 뻔하다.


아마도 총각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여태까지의 한량은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던 걸까. 새끼 서 발, 동이 하나, 쌀 서 말, 죽은 나귀, 산 나귀, 죽은 색시, 산 색시, 소 두 마리와 돈. 집 나온 총각은 새끼 서 발로 시작해 차례차례 그렇게 물물교환 한다. 결국 마지막에서 총각은 음한 부자 영감의 제안까지 받아들이고 통쾌하게 이겨 색시와 돈 모두를 얻는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어머니의 지푸라기 한 짐은 구실이었을 뿐이고 실상 이 총각은 비상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새끼 서 발로 부자가 되다니, 요즘 세상에서도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소재가 아니겠는가. 총각은 분명 보통내기가 아님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총각이 어머니를 극진히 모셔서 효자라던가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던가 하는 어떤 근거도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총각이 죽은 나귀와 죽은 색시를 가지고 농간을 부리는 장면이 용납하기 어렵다. 분명히 그건 거짓말을 통해 얻은 이득이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는다는 보편적인 권선징악의 옛이야기에 위배되지 않는가. 총각은 단지 게을렀을 뿐인데.


이 이야기는 ‘게으름뱅이’로만 여겼던 사람이 뜻밖의 지략으로 엄청난 성공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서민으로선 최대의 꿈인 배우자와 부를 단번에 얻게 되었으나 그의 행위 자체는 무고한 사람을 속이는 사기 행각의 연속으로서, 현실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하지만 설화적 허구로서 엉뚱한 지략을 써서 약자가 강자를 굴복시키고 입신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음흉하고 욕심쟁이인 부자를 보기 좋게 꺾은 것은 통쾌스러울 정도이다. 이 이야기가 드러내고자 한 의도는 주인공이 보여 주는 사기 행각이 아니라 바로 마지막 부분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다.
(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조금은 이해가 된다. 결국은 절대악을 꺾기 위한 게으름뱅이 총각의 여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였구나. 그냥 설화일 뿐이고 웃자고 한 옛날이야기인데 다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아는 서양의 옛이야기에도 얼마나 잔혹한 얘기가 많던가. 어느 나라에서는 아이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도서관에서 그런 종류의 책을 빼는 경우도 있다고 기사로 본 적 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일지라도 사람을 사고팔고 하는 이런 하나하나의 장치가 조금이라도 누군가의 의식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리 잡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너무 과한 우려일까? 아무래도 나쁜 뉴스, 무서운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가 보다.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서 이야기를 하고 들으면서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한 느낌, 이것도 옛날이야기가 주는 특별한 재미의 하나입니다. 아주 잘 아는 이야기라도 우리 마음에 끝나지 않는 물음을 심어 줍니다. 다시 그 이야기를 말하고 듣고 싶어지는 까닭도 거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인생을 출발할지라도 행복해진다는 약속, 옛날이야기가 주는 선물입니다.


어머니가 달려와서 총각을 얼싸안았어요.
뒹굴뒹굴 총각의 혼인 잔치가 벌어졌어요.
사흘 낮 사흘 밤을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렇게 신나는 잔치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대요.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다. 뭐 부지런한 사람만 행복하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게을러도 어찌어찌 살 방도가 생기는 법. 인생이란 어차피 정답이라는 게 없으니까. 옛이야기는 옛이야기일 뿐, 오해하지 말자.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네' 하며 껄껄 크게 한번 웃으면 그만이다. 그러고 나서 총각네 잔치에 우리도 뒹굴뒹굴 사흘 낮 사흘 밤을 진탕 같이 놀아보는 건 어떨까.

이미지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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