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글을 쓰면서
일기부터 따지자면 글을 오랫동안 써왔다. 기댈 곳이 그것밖에 없었다. 상처는 들입다 받아놓고선 입은 누구를 위해 옹졸하게 다물었을까. 울고 싶을 때마다 글을 썼으니 네모난 노트는 내 모든 안간힘의 기록이 됐다. 모두를 이해해 보기 위한. 그러다 5년 전 작가가 되고 싶어 본격적으로 글을 썼다. 쉽지는 않았다. 이놈의 속처럼, 내용도 흐릿한 게 영 별로였다. 소심해서일까, 옛날부터 일기장은 무딘 단어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게 문제인 것 같았다. ‘서운하다. 억울하다.’ 정확히 말해본 적이 없으니, 서서히 ‘슬프다’ 하나로 감정이 뭉뚱그려져 정확하게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 마음은 슬픈 것 하나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허구인 듯, 다른 인물인 척해봐도 주인공은 내가 투영되어 있었다. 가만히 앉아 그 인물을 들여다보기를 오래 반복하니 점점 선명해져 갔다. 옛날 어느 때에 왜 눈물이 났는지, 왜 원망하고 싶었는지. 괜히 어둡게 받아들이는 타고난 부정적 성향 탓인 줄 알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당연한 감정이었다. 다 이유 있는 슬픔이었다. 매 순간 제대로 작동된 심장이었다니! 문제가 없었다니! 그걸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꽤나 컸다. 그렇게 글쓰기로 날 달래갔다.
읽고 쓸수록 느끼는 건 솔직한 글이 제일 매력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글도 점점 솔직해져 갔다. 오랫동안 퇴고를 반복하면서 신경 쓰던 두 개의 작품이 있다. 완성을 해놓고도 어딘가에 드러내지 못하고 하드디스크 안에서 오래도록 낡아갔다. 도전할 배짱이 없나 싶었는데 머릿속에 얼굴들이 떠다니는 걸 보면 그게 이유는 아니다.
‘ 글을 쓰기 위해선 타인을 만들어야 하고, 불가피하게 타인의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하려 한들 그것은 ’ 침범‘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결백할 수 없는 인간이다. 내가 쓰는 글은 내 의지와 노력과는 별개로 누군가에게 위안을 줄 수도,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리고 좋은 영화작가가 되기 위해선 자신의 흠, 치부까지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해져야 한다.’ 책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임대형)>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매번 모자이크를 남겨두는 건 또 사랑하는 이들이다. 그걸 보며 날 이해하겠지만, 그래서 아파하겠지. 그럼 나도 그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겠지. 내 흠과 치부는 얼마든지 드러내고 용감해질 자신이 있었으나 다른 누군가의 영역을 침범하긴 자신 없었다. 좋은 작가가 될 순 없겠구나 자조했다.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 나와 내 주변 모두를 상처 주는 잔인한 결과물. 그렇게 느껴지니 세상에 나온 책들이 아프다. 언젠가 내 책이 나오는 날엔 나도 저질러 버린 후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