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인 욕망
내 우울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고 나서부터는, 암울하고 감상적인 것들에게서 그것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면에서든 아름답다고 느끼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아름다움을 원하는 건 인간의 가장 순수한 욕망이지 않을까. 자신이 아름다워지든, 아름다운 어떤 것을 탐하든 간에 말이다.
'아름답다.'는 발음조차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질간질한 느낌을 주는, 그런 마력을 가진 소리와 뜻이 아닐 수가 없다.
우울에 담긴 아름다움은, 부정적인 것을 이겨내는 데에 있어서 발견된다. 항상 우울감이 찾아오는 이에게는,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도전과 결과가 아름다울 것이다. 설사 실패하고 깨진 것이라도 말이다.
처음에는 감정적인 우울에만 집중했었다. 나의 감정이 깨지고, 다시 새살이 돋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은 정말 아름다웠으니까. 내면의 심미적인 탐구만으로 숨 쉬고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 부러움, 질투, 시기, 비하, 우울, 격정, 체념, 다짐, 열정, 동경. 그리고 잠잠한 평온까지.
깨진 감정의 부스럼들로 쌓은 유리성은 꽤나 매끈한 내면이 되었다.
어느 정도 내면을 미적인 것들로 채우고 나니, 바깥세상이 보였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목표인,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완벽하다는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가 없으니, 완성이라는 마침표는 찍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균형선을 맞추고 싶었을까. 외면도 아름답고 싶었고, 그러려고 노력했다.
단순하거나 자기 파괴적인 것은 아름답지 못했기에, 차분히 정갈한 생활로만 쌓아가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건강해졌다. 몸과 마음이 그동안 쌓아온 것들에 대한 실례라도 된다는 듯이 해로운 것을 멀리했다.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던 먹는 행위가, 발전하기 위한 생존 수단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먹는 것에 대한 탐욕이 많이 사라졌다.
원초적인 욕망에 대한 절제는 소박한 것에도 깊은 행복을 느끼게 해 줬다. 깔끔하게 먹던 습관으로 하루들을 살다가, 소중한 사람이나 동경하는 이들과 가지는 식사는 행복감이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닿고자 하는 아름다움을 쌓는 것에 중독이 된 느낌이었다. 이것도 하나의 선한 욕망인 걸까.
아름다움을 탐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에 도달하고자 해도 완전하게 닿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렇기에 한계에 부닥치면 감정적인 절망과 우울이 뒤따라온다.
하지만 현실적인 부분에서 도달할 수 없다는 명백함을 인지하고, 자기 소신껏 꾸준함에 몰두한다면 회색 것들은 소실된다.
자신의 이상향은 가장 아름다울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닿을 수 없다. 결국에는 욕망의 일부분이기에 '가장'이라는 말은 하나의 수치로 정의될 수 없다.
그리고 닿을 수 없다고 한들, 그 노력이 의미가 없을 수는 없다. 모든 이들이 아름다운 성공을 바라지만, 결국 돋보이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그러면 빛나지 못한 이들의 노력과 실패한 결과는 스러지는 것에 불과할까.
성공을 바라던, 실패를 예견하고 도전하건, 절망적이어도 나아가려는 이들이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그들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고, 정겨웠다.
내가 바라는 아름다움을 갖춘 이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무해하고 대단한 그의 삶이 퍽 흥미로웠다. 그렇게 밤하늘에서 하나의 반짝이는 별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미 어느 정도 아름다움을 갖춘 이의 꾸준한 노력은 내 생활을 더욱 정돈하게 했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노력도 나보다 많이 기울인다는 것 자체가 존경스러웠다.
한순간의 사고에 진흙탕에 빠져 위태롭게 허적이는 저 사람도, 손끝에서 열정이 묻어 나왔다. 격려하고 응원하는 이들의 잡아주는 손목은 무척이나 하얗고, 아름다웠다.
잊지 않고 꼬박꼬박 찾아오는 우울에게 감사함이 우러난다. 덕분에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자체로도 존귀하다는 것을 그때마다 깨닫게 해 준다.
아름다움에는 어쩌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각자 판단 내리는 아름다움에 가까워지려고 달려가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무척이나 눈부신 그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