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 드 몽블랑’은 알프스산맥 최고봉인 몽블랑을 조망하며 걸어서 산군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이 산길은 유럽을 대표하는 종주 트레킹 코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에 걸쳐 있기에 세 나라의 각기 다른 음식과 분위기를 엿볼 수도 있다. 어느 날 내가 좋아하는 길동무가 투르 드 몽블랑 트레킹을 제안했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물었다. 친한 이웃은 알프스를 가면 하이디를 꼭 만나고 오라고 부추기기도 했다. 의기양양해서 길을 나섰다. 목적지까지의 여정은 인천공항을 출발해 두바이공항에서 환승하고, 스위스 제네바공항에 도착한 후, 버스로 프랑스 ‘샤모니’까지 가는 것이었다.
산악마을 샤모니는 1924년에 세계 최초로 동계 올림픽이 개최된 곳이다. 그런 만큼 계절마다 스포츠를 즐기기 위한 여행자의 방문이 많다. 내가 방문했던 초여름에는 트레킹과 몽블랑 빙벽 등반을 위한 여행자로 북적였다. 이곳이 트레커에게 꿈의 길로 알려진 TMB의 시작점인 동시에 알피니즘이 처음 시작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의 중심부 광장에는 ‘발머’가 ‘소쉬르’에게 몽블랑 정상을 가리키는 형상의 동상이 있었다. 발머는 1786년에 몽블랑을 최초로 올랐다고 알려진 사람이고, 소쉬르는 그의 후원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발머에 앞서 정상에 오른 이가 있었음이 알려졌다. ‘파카드’라는 의사였다.
‘투르 드 몽블랑’은 ‘르 투어’에서 오르막 코스를 걷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마을을 지나 숲으로 들어가자 주변 경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천상의 화원인 듯 사방팔방으로 야생화가 널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자연의 조화로움이 황홀했다. 젖소 길이라 불리는 보빈 길에는 알프스의 초원과 야생화가 끝없이 펼쳐져 목가적인 풍경이 연출되었다. 특히 '엔지안'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 알프스임이 실감되었다. 엔지안은 에델바이스, 알핀로제와 함께 스위스의 3대 꽃으로 불린다.
프랑스에서 시작한 길은 스위스의 ‘그랑 콜 페레’ 고개를 넘어서자 이탈리아로 연결되었다. 국가는 바뀌었지만 아름다운 자연은 여전했다. 그러나 보나티 산장을 가기 위해 급경사 1,000m가량을 올라갈 땐 힘들었다. 압도적인 풍광을 감상할 겨를도 없었다.
보나티 산장은 전설적인 등반가 ‘월터 보나티’에게 헌정된 이탈리아의 대표 산장이다. 명성에 걸맞게 음식까지 산속 음식으로 볼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럽고 맛있었다. TMB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더니 그 또한 듣던 그대로였다. 산장에서 그랑조라스 남벽을 마주했을 때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랑조라스와 몽블랑을 바라보며 맞은 일출은 투르 드 몽블랑 최고의 선물이었다.
페레계곡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완만했다. 대부분의 트레커가 반 시계 방향으로 걷는다는데, 우리는 시계 방향으로 코스를 잡았다. 선택은 탁월했다. 걷는 내내 햇빛을 등질 수 있어 걸음이 수월하기도 했거니와 몽블랑을 2시 방향에 놓고 함께 걷는 호사까지 누렸으니 말이다. 산악가이드 '줄리앙'의 경력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반적인 트레킹 길을 벗어나 옛길로 우릴 안내하기도 했다. 야생화 꽃밭에 주저앉아 만년설이 얼어붙은 빙하와 몽블랑을 앞에 두고 얼마나 넋을 놓고 보았던가. 속담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가 내 경우가 된 순간이었다.
‘꾸루마이예’는 이탈리아 북부의 아름다운 산악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이태리 3대 젤라토 중 하나가 있다고 들었기에 일부러 찾아가 맛보았다. 산책 중에는 프랑스의 명품 칼 ‘오피넬’ 판매점을 발견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대의 작은 칼 한 자루를 셀프 선물했다. 이탈리아의 마을이지만 프랑스 국경 가까이 있어 매장이 있는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TMB 5일 차에는 비 그친 알프스를 걸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콜 데 라 세르 고개'를 넘으며 경사진 눈길에서 아래로 미끄러졌다. 간담이 서늘했다. 7월 초까지도 잔설이 있기 때문에 미끄러지면 실족의 위험이 있어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6일 차 트레킹을 시작하며 줄리앙은 매우 어려운 코스를 걷게 될 거라고 했다. 가파른 오르막을 두 시간쯤 올라 도착한 ‘콜 뒤 본옴므’에서 성난 바람을 만났다. 내가 마치 갈대인 듯 중심 없이 흔들렸다. 제주도 오름의 바람은 바람 축에 끼지도 못할 만큼 거셌다. 그 와중에 나는 급경사 너덜 길에서 자갈에 미끄러져 아래로 곤두박질을 쳤다. 운이 나빴다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우리나라 뉴스에 나왔을 거라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귀가 조금 찢어졌고 팔다리는 멍이 들었지만 천행이었다.
트레킹을 마치고 샤모니로 원점 회귀했을 때는 산악마을의 야생화 널린 길을 여유롭게 걸었다. ‘레 플라즈’에서 케이블카로 락블랑을 오르기도, 몽땅베르 산악열차를 타기도 했다. 3,842m의 ‘에귀 뒤 미디’ 전망대에 올랐을 때는 또 어떠했던가. 몽블랑은 물론이고 알프스의 설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진풍경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곳에서 나는 감탄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가슴이 시원하게 열렸다. 킬리만자로나 히말라야와 다른 느낌의 설산이 그곳에 있었다.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샤모니에서 몽블랑 산군이 그려진 티셔츠와 스위스의 카우벨을 구입하니 비로소 투르 드 몽블랑을 끝낸 게 실감되었다. 경치에 압도된 흐뭇한 길 위의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