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곳은 어디에나 이중성이 공존하는가 보다. 마음이 상처를 심하게 받아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졌다. 히말라야의 신에게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위로받고 싶어 다시 배낭을 멨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출입을 신고하고 들어선 마을 ‘탈’에서였다. ‘축복합니다.’란 꽃말의 포인세티아가 거대한 나무로 서 있었다. 마치 내 여정이 축복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은 안나푸르나 산군을 한 바퀴 도는 트레킹 코스이다. 안나푸르나 서킷이라고도 하는 이 여정은 히말라야의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하며 걷다가 ‘토롱 라(5,416m)'를 넘어 내려가는 것으로 트레킹이 마무리된다. 나는 물, 간식, 비옷 등 하루치 생필품이 든 배낭을 멨고, 침낭, 여벌 옷 등 대부분의 짐이 든 카고백은 포터가 지고 걸었다.
가끔은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어린아이를 만나기도 했다. 간식을 나눠주고 싶어 손가락이 꼼지락거렸지만,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어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지 않는 게 트레커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에 사는 아이는 충치가 생겨도 제때 치과 치료를 받을 수 없단다. 그러니 사탕이나 초콜릿을 주지 않는 게 아이를 위하는 것이라는 게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차메’에서 ‘피상’까지 가던 트레킹 5일 차는 특별한 풍경 때문에 기억이 생생하다. 람중히말(6,984m)과 안나푸르나 산군을 조망하며 걷다가 타르초 아래서 어반 스케치를 하는 초로의 서양 남성을 만났다. 그림에만 몰두한 여유로움이 내 눈에 신선놀음으로 보였다. 돌아가면 나도 그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저장했다. 또 하나의 풍경은 밭갈이였다. 농부가 두 마리 소에 쟁기를 붙여 끌며 메마른 밭을 갈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우리나라 농촌 풍경과 비슷했다. 한 마리 소가 쟁기를 메고 논밭을 갈면 ‘호리’, 두 마리 소를 활용하면 ‘겨리’라 하는데, 히말라야 산속을 걷다가 겨리질하는 소를 만나니 정말 신기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도 3,000m가 가까워지면 고산증세에 대비해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 3,200m에 위치한 ‘피상’에 도착하니 겨울이 온 듯 추위가 심했다. 롯지에서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동네 구경을 나갔다. 집집마다 제주도의 정낭처럼 대문 없이 긴 막대기를 양 쪽 기둥에 걸쳐놓아 눈길을 끌었다. 겨리질이나 정낭은 우리나라만의 풍습이라 여겼는데 히말라야에서 보게 되니 경이로웠다.
고산 적응을 위해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곰파까지 올라가는데 숨이 턱에 찼다. 곰파는 네팔의 불교 사원이다.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불탑으로 ‘스투파’가 세워졌고, 불탑 근처에는 예외 없이 바람에 오색 깃발 타르초가 펄럭였다. 만국기처럼 늘어뜨린 타르초에는 진언으로 불교 경전이 적혀 있어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며 걷는 걸음걸음이 영혼의 울림 같았다.
마을을 지나가다 보면 불탑을 세울 수 없는 곳에는 돌탑이 쌓여 있고, 불경 두루마리를 말아 넣은 원통 모양의 ‘마니차’도 자주 보였다. 이곳 사람들은 마니차를 한 번씩 돌릴 때마다 죄업이 한 가지씩 사라진다고 믿는다. 나도 마니차가 보일 때마다 ‘옴 마니 반메훔’을 중얼거리며 돌리고 지나갔다.
해발 3,500m의 ‘마낭’으로 가는 코스는 정말 공허했다. 황무지의 황량함이 마음의 허허로움과 만나 자꾸 정신을 어지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푸르나 2,3,4봉과 강가푸르나, 람중히말 등 안나푸르나 산군을 바라보며 걷는 게 위안이 되었다. 고도 4,000m가 넘으니 조석과 한낮의 기온 차가 매우 컸다. 낮에는 겉옷도 벗을 만큼 따뜻한데, 해가 지면 헤비다운을 꺼내 입어야 할 만큼 추위가 몰려왔다. ‘레다르’로 가는 길에 만난 야크 떼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견뎠다. 그러나 고도가 높아 식물이 자라기 어려운 이곳에서 워낭 소리를 들으니 구슬펐다. 어쩌면 내가 지쳐있어 더 서럽게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8일째 되던 ‘레다르’에서는 다이아막스 반 알을 먹었다. 목적지 도착 전날이라 안전한 게 최고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날씨는 맑았다. 그러나 너덜 길에 산사태까지 나는 위험한 지역을 걷느라 앞사람과의 간격을 1m 이상 넓혀야 했다. 낙석이 떨어진다면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초긴장 상태로 걸었다. 자연이 만든 길은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아름다움을 안고 있었다. 디자인해서 나올 길의 형태가 아니었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목적지까지 단 하루를 남겨놓고 고소 적응을 위해 토롱페디(4,450m)까지 올랐다 원점 회귀했다. 고통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몇 걸음 못 가고 멈추길 반복하며 겨우 다녀왔다.
바람도 잠잔다는 첫새벽 2시 30분에 엄청난 일을 하러 가는 사람처럼 ‘토롱 라’를 향해 출발했다. ‘토롱 라’는 바람이 불기 전에 넘는 것이 성공을 결정짓는다고 한다. 그만큼 추위가 엄청났다. 그러나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고비가 왔다. 그대로 스러져도 아깝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힘들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만큼 차오르는 숨을 뱉어낼 겨를이 없었다. 허리는 자꾸 꼬부라졌고, 희박한 공기 속에 내딛는 발걸음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상처받은 마음은 고통으로 덮였고, 찌그러진 머릿속은 비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끝이 보이지 않아 숨이 멎을 것 같던 아침 7시 35분, 드디어 ‘토롱 라’에 섰다. 눈물이 왈칵 터졌다. 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행길의 끝이었다. 많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 눈물, 콧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실컷 울었다. 새날 새로이 떠오르는 태양이 안나푸르나 산군을 휘감으며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새 바람을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새날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