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사과를 보고 "사과"라고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과라고 이해하고 미국 사람들은 Apple(애플)이라고 이해하며, 스페인 사람들은 Manzana(만자나)라고 이해한다. 한 가지의 사물을 보고서도 8 빌리언이 넘는 지구상의 사람들은 다르게 이해한다. 심지어 사물을 넘어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다르게 이해한다. 이유는 "이해와 생각이라는 것은 단지 배우고 경험한 것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밀림에서 고릴라 부모아래에서 자라난 타잔은 고릴라의 삶을 이해할 뿐, 인간들의 행위와 생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밀림에서 자란 사람들의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빌딩과 차를 처음 본 후 무엇에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의 이야기를 좀 더 현실에 적용시켜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왜 어떤 행위를 보거나 듣고 난 후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것일까? 한국에선 유모차를 몰고 백화점의 엘리베이토를 탄 부모는 다른 사람들이 본인과 유모차를 불편하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같이 엘리베이터에 있는 사람들은 "왜 유모차를 끌로 쇼핑을 왔지"라고 생각한다. 북미에선 유모차는 당연히 우선순위이고 어떤 이도 유모차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나 미국에선 자선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칭찬을 한다면 오만이라는 나라의 Muscat이나 그리스의 아테네 같은 곳에선 자선사업을 많이 하면 사회의 비난을 받게 된다. 비난의 이유는 그 나라에서 태어나 보고 들은 사람만이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을 이해하고, 학교에 가서 교과서와 선생님들의 이야기로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타잔이 그의 양육부모인 고릴라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태어나서부터 내가 배우고 들은 것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독일의 교육과정은 한국과 많이 다르게 형성되어 있다. 독일의 대학은 학문이라는 목적이 뚜렷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옵션이다. 하지만 한국은 대학이 좋은(?) 삶이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한국에선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대학과 인생은 그러한 관계가 있다고 듣고 보았고,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학과 삶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바꿀 수는 있을까? 나의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을 바꿀 수 있을까? 질문에 답변은 "물론'이다.
첫 번째, 내가 지금까지 듣고 본 것과는 다르게 이야기하는 정보가 필요하다. 역사, 전기문, 철학책 등이 괜찮은 정보일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한 잘못된 정보는 조심해야 한다. 두 번째로, 다른 정보를 이용해 어떠한 사실을 다르게 이해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어떤 사실을 보고 듣게 될 경우 그 사실이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알려야 한다. 마치 어릴 때부터 부모나 학교에서 반복적인 이야기로 어떤 사실을 이해하는 것처럼 이다.
먹는 사과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대학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좋은(?) 대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이해일뿐이다. 우리가 맛나게 먹는 스테이크와 바비큐의 재료인 소. 세상 어느 곳에는 소를 먹는 것을 죄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는 단지 소일뿐이다. 인간은 한 가지의 사물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매일 지나다니는 아무 의미 없는 나무가 어떤 이유에서 기도를 드리는 특별한 의미를 주게 되면 신성한 나무가 되어버린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고, 어떠한 이야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사실과 이해를 잘 정리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