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와이프의 신발을 신을 수 없다
감성지능, Emotional Intelligence
요즘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항상 실타래처럼 어울려서 살아야 하기에 감성지능이라는 것이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다. 뭐 아닐 수도 있다. 감성지능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해한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감성지능의 이해를 도와주는 표현으로 "다른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선 다른 이의 신발을 신어봐야 알 수 있다". 다른 이의 신발을 신어보다 라는 게 뭘까?
아침에 와이프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온 이야기이다. 나의 감성지능으로 와이프의 신발을 신어 볼 수 있을까? 신어 본다면 무엇을 더 잘 알 수 있을까?
동시에 이런 질문도 던져 보았다. 우리는 나에게 맞는 신발을 신고 있는가? 신발을 사러 가서 맞는 신발을 신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느낌은 발이 쉽게 말해준다. 그렇다면 인생신발은 어떠할까? 본인이 잘 맞는 인생신발을 신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정도 일 것이다. 딱 맞는 인생 신발을 신고 있어서 아주 행복하고 편안함. 아니면 어딘가 맞지 않는 인생 신발로 항상 뭔가가 불편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상태? 그래서 다른 이가 내 신발을 신어 줬으면 하는 의존적인 생각에서 감성지능이란 개념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나에게 딱 맞는 인생 신발을 신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상황이면 굳이 내 신발을 다른 이에게 신어보라고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물어본다는 행위는 순수한 궁금함에서 나올 수 도 있지만 뭔가가 불안한 생태에서 의존을 표시하는 감정으로 나오기도 한다. 아이들이 그냥 궁금해서 엄마나 아빠에게 물어보는 "학교는 왜 가야 돼?"와 어른이 직장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에게 "왜 맨날 일하러 가야 하는 거야?"라는 것은 어딘가가 차이가 있어 보인다. 아이는 단순한 질문에 답변을 원하는 것이고, 어른은 질문에 답변을 원한다기보단(왜냐면 직장을 가야 돈을 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다른 감정적인 위로나 이해를 바라는 것이다. 나의 직장이 나와는 맞지 않고, 그래서 그 불안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감정적인 이해를 받기 위해 물어보는 것이다. 상대가 "그러니까. 사회가 문제야!!"라고 대답해 주면 대답을 해준 이가 감성지능을 잘 활용한 것으로 느껴지고 "네가 최고야, 내가 힘든지 어떻게 알았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푸념을 늘어놓을 것이다. 많이 들어보았고 일어나는 이러한 대화, 뭔가가 불편해 보이고 해결책도 보이질 않는다.
나와 딱 맞는 인생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행복하고 나의 인생에 만족을 느끼며 살고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딱 맞는 인생신발을 신고 사는 사람들은 아마 고인이라 칭해지며 많은 존경을 받는 사람이나, 아님 오랜 시간을 자신에 대해서 고민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도 아주 극 소수의 숫자일 것이다. 극 소수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에 대한 생각과 고찰을 오랜 시간동안 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어떻게 본인에게 딱 맞는 신발을 찾았냐"라고 물어본다면 자신을 사랑하고 본인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보라고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다른 점이 아닐까? 다른 이에게 어떻게 하면 되냐는 질문보단 본인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그렇다면 지능감정이라는 것은 자신의 신발을 아직 찾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발을 찾지 못한 다른 대부분의 이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질문을 하거나, 혹 이해를 하려는 것 같은 오묘한 관계가 될 수 도 있다고 생각한다. 불안한 본인을 인지하고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질문으로 자신을 알아가려는 행동 보단, 불안한 하나의 개체가 또 다른 불안한 개체를 만나서 뭔가를 해보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많이 화두가 되고는 있지만 얼마나 우리의 인생에 유용(?)하게 쓰일지는 의문이다.
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