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야기를 하는 동물이다. 이야기에는 이러한 성향이 있다. 시작과 끝이 있고, 처음과 두 번째가 있고, 좋음과 나쁨이 있고, 사랑과 미움이 있고, 우리가 눈을 뜨는 순간부터 머릿속 아님 입을 통해 쏟아내는 이야기는 끝이 없다. 물론 이야기의 길이도 항상 차이가 있다. 직장 상사를 x 하는 퇴근 후의 이야기는 소주 한잔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잔을 원샷으로 털어내는 순간까지 대부분 이어진다. 뭐 정신을 잃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엄마들이 만나서 나누게 될 남편과 시댁의 이야기는 아마 시간의 제약이 없으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될 수도 있다. 어떤 이의 사랑 이야기는 가끔 책이나 영화로도 나온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잘 스며있는 듯하다.
오늘이나 어제를 잘 뒤돌아 보면 우리에겐 이야기가 부족했던 순간은 한순간도 없다. 아이가 일어나서 엄마나 아빠에게 하는 짧게나마 했을, "안녕히 주무셨어요? 난 잘 잤어요." 아이는 자기는 잘 잤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보다. 그럼 직장을 가는 도중 동료를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어떨까? 차가 막혔다거나,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정신이 없다던가, 회사의 누구를 좋아한다던가, 오늘 아침에 있을 회의를 걱정한다던가, 아주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이야기"라는 것을 잘 살펴보자.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을 이야기라는 것을 통해 풀어내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쏟아내어 질 이야기, 바로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이야기는 멜로, 공포, 스릴러, 사랑, 가족, 우애 등, 아주 여러 가지의 방향으로 풀어질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도 세상을 보는 눈과 비슷할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즉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끔은 5년 10년 후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를 보게 된다. 감옥에 수감되었던 범죄자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성직자가 강연자로 바뀐 이야기. 할렘가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예전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다와 비슷하달까? 어째서일까? 바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 사람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이야기가 흘러가는 길을, 즉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인생을 길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 줄 때도 있고 오히려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돌려놓을 때도 있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아님 더욱 좋지 않은 방향으로? 아이들의 학교에서 힘듦에 대한 이야기를 더 힘들게 하지는 않는지? "공부가 너무 힘들어"라는 아이의 이야기에 "그 모양으로 해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으로 남아!" 남편이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라는 이야기에 "내일 당장 집에서 쫓겨나는 꼴 보고 싶어?", 아내의 고민에 담긴 "몸에 기운도 없고 기분이 별로네"라는 이야기에 "맨날 집에서 퍼져 있으니까 그 모양이지". 우리는 상대의 이야기를 오히려 더 나쁘게 만들지는 않는지? 방향을 조절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다. 오른쪽으로 갈지, 아님 왼쪽으로 갈지.
삶과 문화 코칭을 시작하고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찌 보면 코칭이라는 일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물어보는 사람들이다. 물론 질문에 약간의 조미료가 첨가되어 있다. 그에 이야기를 한 사람은 조미료가 첨가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맛을 음미하게 된다. 흠...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 짜다던가, 아님 너무 맵다던가, 아니면 너무 달다던가. 조금 내가 하는 행동을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