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본능, 상상의 낭비를 거부하다
아이들은 안다, 상상의 아픔이 현실의 아픔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한번 뜨거운 솥에 손을 덴 아이는 다시는 그 솥에 손을 대지 않아요. 왜일까요? 간단하죠. 아플 필요가 없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뜨거운 솥에 손을 가져가는 상상조차 하지 않아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프게 느껴질 테니까요. 그게 무의미할 뿐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를 쓸 필요도 없죠.
사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걸 알아요. 궁금한 게 많고 모험을 좋아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상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요. 심리학자들도 말하죠. ‘상상 속의 아픔이 실제 아픔과 똑같이 우리의 뇌에 영향을 미친다’고요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과 좀 다르죠. 가끔 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상황을 상상만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 익숙해진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는 '그런 상상은 도움이 안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본인에게는 그걸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비현실적인 걱정 속에 빠지기를 좋아하는 걸까요?
아이들이 커서 잘못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는 순간이 있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머릿속에서는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우리 아이들은 왜 저럴까?',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고?'라는 생각들이 가득 차요. '아빠나 엄마가 이러니 아이들도 그러는 거겠지'라는 자책까지 들기도 하죠. 그러다 보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이 계속해서 나와요. 하지만 결국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아는 거예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맞는지 틀린 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어요. 그냥 내 생각일 뿐이죠. 아마 오늘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그들의 부모가 미리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들도 분명 '잘못될지도 모른다'며 걱정했을 테니까요.
아이들을 다 키우신 할머니, 할아버지께 '아이들을 미리 걱정한 것이 정말 도움이 되었나요?'라고 여쭤보면,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하세요. '아이들은 건강하게만 자라면 돼!' 그래서 손주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하죠. 이유는 간단해요. 어른들이 하는 현실적이지 않은 걱정을 하질 않으시니까요.
대학에 못 가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라는 고민에 빠진 적이 있나요? 혹은 부모님이 "우리 형편에 대학은 힘들다"라고 한탄하거나, "대학 못 가면 인생 끝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말 멋진 인생을 살고 있을까요? 대학을 나와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은 '그때 왜 그렇게 고민했을까?' 하며, 그게 괜한 걱정이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오히려, 그런 걱정 대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뭘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죠. 실제로 그게 삶에 더 큰 영양분이 될 거라고 조언할 겁니다.
제가 사는 북미에서는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좋은 대학 = 좋은 삶'이라는 공식은 사실 어디에도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이지, 어디를 나왔느냐가 아닙니다.
지루할 수도 있지만 생물학 적으로 우리는 왜 이렇게 걱정을 많이 하는지 한번 알아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건, 사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진화해 온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에요. 위험을 감지하면 몸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고, 심장은 더 빨리 뛰기 시작하죠. 이건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서 살아남으려는 건강한 반응이에요.
옛날에는 맹수 같은 위험한 동물들을 피해야 할 때가 많았을 거예요. 그럴 때 심장이 빨리 뛰고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는 건, 재빨리 도망가는 데 큰 도움이 됐겠죠. 정말 멋진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있게 해 주니까요.
그리고 위험에서 벗어나면 몸은 다시 진정되죠. 호르몬 수치도 안정되고, 심장 박동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요. 이런 과정은 우리 몸이 스스로를 지키는 자연스러운 방식이에요.
그렇다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점이 다를까요? 예전처럼 우리를 위협하는 큰 동물들은 더 이상 주변에 없죠. 그런데도 여전히 아픔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건 왜일까요? 사실, 그 기능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고, 이제는 실재하는 위험이 아닌 상상의 것들—심리적인 상황들—에 그 감정이 반응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학교 성적이나 대학 입학, 직장 취업, 자녀 교육, 배우자의 행동 같은 것들이 있죠.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실제 위험 대신에, 이런 상상의 문제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거예요.
생각해 보면, 우리 선조들은 자신을 해할 수 있는 동물들을 두려워했어요. 눈에 보이는 위험을 마주했을 때만 긴장했죠. 그런데 현대인은 어떨까요?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 알림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어요. 집 밖에 나갈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상상의 위험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거죠.
연구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위험이 사라지면 곧바로 평온을 되찾았다고 해요. 호르몬도, 몸도 다시 안정되는 경험을 했죠. 하지만 현대인은 어떤가요? 상상의 위험이 끝나지 않아요.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스트레스 호르몬이 쏟아져 나와서 정신적, 신체적으로 고통을 느낀다고 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하지 않나요?
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