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 혹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 영어로는 Fact이다.
우주의 빅뱅은 사실이다. 한국의 4 계절 또한 사실이다. 공기가 없으면 인간이 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해가 지는 것은 사실일까? 달이 뜨는 것은 사실일까?
내가 있는 곳에서 보기엔 해가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곳에 있는 사람에겐 해가 뜨는 경우가 될 수가 있다. 나에겐 달이 뜨지만 다른 지역에 있는 이에겐 달은 져버렸다. 그렇다면 해가 뜨고 지고, 그리고 달이 뜨고 지는 것은 사실이기보단 지금 일어고 있는 일을 내가 보는 관점에 맞추어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올바르다. 이 점을 잘 염두하자.
이제 나와 너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옥순과 영철 커플이 데이트를 한다. 데이트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마치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도는 것처럼. 하지만 옥순과 영철이 느끼는 데이트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마치 누구에겐 해가 뜨고 다른 이에겐 해가 지듯이. 연인이 데이트를 했다고해서 그 사실을 같이 이해하지는 않는다. 한쪽은 아주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상대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사실이 문제이다.
일단 한 심리학 연구를 이야기해 보자.
자이가르닉 효과는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이 처음 관찰한 현상이다. 그녀는 식당에서 웨이터들이 아주 다양한 고객의 주문을 정확히 기억하다가도, 주방에 주문을 전달한 후에는 잊어버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 관찰을 바탕으로, 그녀는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완료되지 않은 과제나 중단된 작업을 완료된 작업보다 더 잘 기억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는 미완성된 일이 우리 뇌에 인지적 긴장을 유발하여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원리이다. 즉 자이가르닉 효과는 완료되지 않은 일이 완료된 일보다 더 잘 기억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감정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경우 사람은 그 일을 계속 떠올리게 되며, 이는 인간관계에서 갈등이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옥순 영철 커플의 데이트 이야기를 해보자.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커플이 데이트를 한 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날을 기억한다. 옥순은 데이트 중 대화에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적인 문제를 느껴 그 경험을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기억하게 된다. 반면 영철은 데이트를 즐겁게 느끼고, 저녁 식사나 활동이 잘 진행되었다고 생각해 그 경험을 "완료된" 것으로 기억한다. 즉 옥순의 경험은 끝나지 않은 주문이고 영철의 경험은 끝난 주문이다. 바로 옥순은 해결되지 않은 감정적 긴장 때문에 그 데이트를 계속해서 기억하지만, 영철은 그날을 빠르게 잊어버린다.
몇 달 후, 옥순은 그날의 대화를 다시 떠올리며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 이야기를 나눠보려 하지만 영철은 그 기억을 거의 떠올리지 못한다. 영철에겐 이전 데이트에서의 대화는 이미 완료된 일인 것이다. 이미 끝난 주문은 영철의 머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이러한 기억의 차이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자이가르닉 효과가 작용하여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관계 속에서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에, 감정적 이슈를 해결하고 서로 소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옥순과 영철의 데이트에서 서로에게 사실이란 무엇일까? 며칠 전 부부싸움은 서로에게 어떠한 사실로 남아있을까? 우리 가족이 올여름 같이 한 여행은 다들 어떤 사실로 기억하고 있을까? 서로에게 같은 사실이란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