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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루토 Oct 25. 2020

[포틀랜드 일기] 블루 스타 도넛

포틀랜드 관광 리스트에 도넛계의 양대 산맥으로 언급되는 블루 스타 도넛 (Blue Star Donuts) 과 부두 도넛 (Voodoo Doughnuts). 부두 도넛은 맛은 일반적인 평범한 도넛인데 도넛 모양이 해괴망측(!)한 모양들이 많아서 재밌다. 이름에 걸맞게 부두 인형 모양부터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남성 성기 모양 도넛. 길을 가다 보면 쨍한 핑크색의 부두 도넛 상자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부두 도넛은 맛이 평범해서 우리 가족은 블루 스타 도넛에 훨씬 자주 간다. 블루 스타 도넛의 맛조합 (flavor profile)은 말그대로 포틀랜드스럽다. 조금 생뚱맞고 이상하고 특이하달까 (quirky and weird Portland!)


포틀랜드는 독특한 로컬 컬쳐로 유명하다. "포틀랜드가 지속적으로 괴상하기를!" 유명한 "Keep Portland Weird" 싸인이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로컬로 생산하고 실험하고 만들어 파는 문화가 강하다. 이 자그마한 도시의 크나큰 매력 중 하나다. 소금집에 가면 스텀프타운과 협업한 커피맛 소금을 팔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면 로컬 농부들과 협업한 라벤다맛 아이스크림을 팔고 뭐 이런 식이다.


블루 스타 도넛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은 메이플 베이컨 도넛과 올리브 오렌지 도넛, 그리고 블루베리 버번 바질향이다. 정말 모두 기똥차게 맛을 뽑아냈다! 이상할 것 같은 조합들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 심지어 무슨 도넛 가게에서 파는 드립 커피가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웬만한 커피집 아메리카노보다 훨씬 맛있다. 쵸컬렛향이 진하면서 동시에 깊게 씁쓰름한 블랙 커피다. 달달한 도넛의 맛을 완벽하게 상쇄해주는 묵직한 맛이다. 다운타운 놀드스트롬 백화점에 들르는 날엔 꼭 길 건너 꾸스와 블루 스타 도넛을 가곤 했다. 커다란 유리창문 앞에 앉아서 꾸스와 함께 도넛과 커피를 놓고 앉아서 지나가는 트램을 바라보곤 했다.




지난 며칠, 꾸스는 기운이 없었다. 축 처져 있고, 그 좋아하던 기차 장난감에도 심드렁했다. 식욕도 줄었다. 바나나는 세개씩 먹고 미니 머핀은 7-8개씩 먹는 대식가가! 토들러 우울증이라도 찾아오는게 아닌가 겁이 났다. 오래된 집안 생활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에 아이도 지겨움을 느낄만 했다.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뮤지엄도 다니고 하다못해 엄마 아빠랑 장이라도 보러 다니며 사람 구경도 하고 물건 구경도 할텐데, 전혀 그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안되겠다 싶어 걱정하던 차 꾸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 도넛 먹으러 갈까?”


“도넛?”


“엄마랑 아빠랑 도넛 먹으러 가서 우리 같이 도넛 먹으면서 기차 봤잖아. 우리 거기 갈까?”


오죽했으면 세살 아이가 “예전에” 도넛 먹으러 가던 기억을 이야기할까. 그래, 마스크 쓰고 나서보자. 꾸스에게 마스크를 써야한다고 하니 굳은 의지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우리 셋은 집을 나섰다.


그런데 GPS가 이상했다. 우리가 아는 지점이 아니라 다른 지점으로 안내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가는 본점으로 가야만 통유리 창으로 기차를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서둘러 구글해보니, 본점은 코로나 이후로 문을 닫고 말았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도넛을 사서 그 자리에 앉아 먹는 손님들이었는데 테이크아웃만으로 매상 유지가 안되니까 (땅값이 제일 비싼 곳에 위치한) 본점은 문을 닫은 것이다.


서둘러 찾아보니 포틀랜드 도심 강가 지구에 새로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도넛을 사서 강가에 앉아 먹으면 되겠다 싶어서 서둘러 방향을 바꿨다. 다행히 도착하고 보니 새로 연 가게는 코로나에 잘 대응하고 있었다. 계산대를 아예 문 밖으로 내놓고 가게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게 해두었다. 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도넛을 보고 고르면 바로 직원이 가져다 주는 테이크 아웃 시스템이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6피트 (약 2미터) 거리로 줄을 설 수 있게 표시도 되어 있고, 다행히 포틀랜드 다운타운이다 보니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도 잘 쓰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외곽 지역만 해도 한산하다 보니 산책하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잘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꾸스는 3월달 코로나가 터진 후 처음으로 “가게” 앞 에 줄을 서보게 되었다.


갓 만든 도넛을 들고 포틀랜드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윌라멧 (Willamette) 강가 벤치에 앉았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날이 약간 쌀쌀하다. 꾸스는 마스크를 벗고 한 입 베어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집중해서 먹는 것이 꾸스가 맛있는 걸 먹을 때 보이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어째 짠했다.


이 자그마한 외출이 우리 가족에겐 큰 발걸음이었다. 지난 몇 개월, 우리는 장 보는 것 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달만 시켰다. 이제는 코로나가 길어지고 있고 그럴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마스크를 쓰고 세정제를 써가며, 최대한 안전 수칙을 지키는 선에서 아주 작은 것들은 해나가야 한단 것을 느끼고 있다. 아이와 우리 부부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야외 활동이고 마스크를 쓴단 전제하에 조금씩 아이에에게 숨통을 틔워주려고 한다. 슬프게도, 그렇게, 세상에 나온지 삼 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마스크를 쓰고 호흡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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