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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May 01. 2024

개나 돼지나, 아무렇게나

경상도 사투리 '대나 깨나'에 대하여

경상도 사투리 중에 '대나 깨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말을 '아무거나 막 한다' 혹은 '함부로 덤빈다'같은 의미로 많이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저뿐만 아니라, 제 친구, 가족, 친척, 지인 모두 이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지인과의 대화에서도 이 말을 사용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대나 깨나'가 뭐예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전자책 발행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대나 깨나'는 아래의 연유로 제 입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 전자책을 우선 발행해서 성과물을 갖는 게 목표예요? 아니면 늦더라도 좀 더 면밀하게 완성도를 높이고 싶어요?

지인: 잘 모르겠어요. 빨리 하고도 싶고. 하는 김에 더 잘하고도 싶고요.

: 00씨 성격에 완성도를 높이려 준비한다면, 제 생각엔 하 세월일 것 같은데요. 너무 완벽주의잖아요~

지인: 맞아요. 그래서 나도 선뜻 결심을 못하겠는 거라.

: 일단 빨리 성과물부터 냅시다. 그러고 나서 더 보완해서 완성도 높이면 되지요.

지인: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전자책 냈는데 엉망이면 사람들이 뭐라 하지 않을까요?

: 아닌 말로, 누가 우리 책을 사 보겠어요? 이 정도도 첫 전자책치곤 훌륭합니다. 00씨가 욕심이 많은 거지.

지인: 그래도....

: 성과물 하나 내고. 또 보완해서 독립출판도 하고. 블로그도 계속하고. 대나 깨나 해보는 거지 뭘요!



지인은 대강의 뉘앙스는 알 것 같았지만, 정확한 뜻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답니다.

"뭐 대충 그리고 아무렇게나 이것저것 다 해보자는 말이지요"

저는 제가 느끼는 느낌대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내가 아는 경상도인들은 다들 이렇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질문을 받고, '대나 깨나'를 대신할 말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저것 해보는 거지요."라든가,

"아무거나 막 해보는 거지요."같은 것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은 "이것저것 막 해보는 거지요."에서는 속 시원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냥 '이것저것 막 해보는 거지요.'는 조금 신중히 조심스럽게 간 보면서 어떤 것을 해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대나 깨나 해보는 거지요"에서는 앞뒤 재지 않고 몸을 먼저 움직여 일을 먼저 해놓고 보자는, 약간은 무대뽀의 기운이 포함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 저는(경상도사람은) "아무거나 막 한다"보다 "대나 깨나 해 쌓는다"는 말이 더 입에 착착 감기며 성질 급한 경상도 사람의 정서에 더 맞다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인에게

"더 잘하려고 생각을 많이 하며 일을 천천히 하는 것보다, 일단 먼저 저질러서 좀 부족하더라도 결과물을 먼저 하나라도 내놓고 추후 보완을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전문가도 아니며, 이제 브랜딩을 시작한 입장이니 브랜딩용으로라도 결과물이 먼저 있는 게 좋지 않겠수?"

라는 말이 하고 싶었으며 또

"하나라도 시작을 해야 두 번째가 있고 다음이 있는 거지, 재다 보면 시간만 가고 결국 아무것도 못합니다. 일단 뭐든 합시다!"

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지인의 콘텐츠는 제가 보기에는 굳이 보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완벽주의자 지인의 망설임이 있었기에 그것을 깨부수고도 싶었습니다. 이런 느낌 이런 말을 가급적 짧은 단어로 축약하여 보여주기에 '대나 깨나'는 저에게 아주 적절한 단어 선택이었습니다.



작년부터 박경리 님의 <토지>를 읽고 있습니다. <토지>는 경상도 사투리의 향연입니다. 아주 오랜 사투리부터 아직도 많이 쓰는 사투리의 보고입니다. 다른 지역 친구들이 1부를 읽는데 아주 많은 공을 들이는 데 비해 나는 가족과 대화는 느낌으로 책을 술술 읽어갔습니다.


그런데 <토지>에서 '대나 깨나'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대나 깨나'가 사용됐던 부분에 *표시가 있었고 *표시가 있는 단어는 뒷부분에 단어 설명을 놓았습니다. 설명을 찾아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대나 깨나: 윷의 돼지와 개.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대나 깨나'는 윷놀이할 때의 도인 돼지와 개인 개를 뜻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도나 개나'라는 말이 아마 '대나 깨나'로 바뀐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짐작에 근거를 얻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네요.

'걸이나 개나'도 아니고 '윷이나 모나'도 아니고 하필 '도나 개나'라니! 이유가 무척 궁금했지만 이에 대한 어떤 것도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말의 세계에서 사투리는 소외되어 있나 봅니다.


'대나 깨나'의 뜻은 제가 알고 있던 것과 아주 유사했습니다: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아무렇게나'보다 '대나 깨나'가 얼마나 라임이 멋들어집니까?

'마구잡이로'보다 '대나 깨나'가 더 운율이 맞지 않습니까?


제가 사투리가 더 '쩐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걸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보다 '대나 깨나'가 훨씬 더 편하고, 제 뜻에도 맞고, 제 입에도 착착 붙습니다. 앞으로도 은연중에 '대나 깨나'가 툭 튀어나올 텐데 그때마다 단어를 설명할 일은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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