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 오지 마

by 소믈리연
frans-vledder-VT8l5wC_pTA-unsplash.jpg


오전 9시에 집에서 나가, 12시간 만에 돌아왔다. 옷도 갈아입기 전, 내일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 아이 짐을 쌌다.

코치님이 주신 종이를 꺼내 여벌 옷, 세면도구, 휴대폰 충전기 등을 꺼내 거실 한쪽으로 모았다. 2박 3일 동안 훈련 겸 대회 준비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아이 옷이 들어있는 서랍 네 칸을 모조리 열었다 닫았다,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검은색 양말만 고르고, 300ml 용량인 알로에 겔을 찾아 여행용 천 가방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체력을 많이 쓰면 어지럼증이 오는 아이라, 약 좀 챙겨주려니 됐단다.

얼굴 많이 타면 안 되니 선크림 꼭 바르란 말엔 건성으로 답한다.

휴대폰 사용 시간을 늘려주려니 괜찮단다.


지난달. 예천에서 전국 육상 대회가 열렸다. 그때도 2박 3일 일정으로 떠나 있었다. 심심하진 않을까, 잠은 제대로 잘까, 아프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보다, 다른 일이 있었다.

"왜? 왜 가면 안돼? 아들 대회하는 거 보러 가면 안 돼?"

"응, 안돼. 절대 오지 마."

"왜? 다른 친구들도 엄마, 아빠가 안 오신대?"

"그건 모르지."

"근데 왜 엄마아빠는 오지 말라고 하는 거야?"

"... 긴장 돼. 저번 달에 엄마, 아빠 안 오니까 우승했잖아. 안 그래도 긴장되는데,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못해..."


예천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코치님 차로 이동했다.

오지 말라고 했으니, 안 가야지 하면서도 궁금했다. 대회 당일. 둘째를 학교에 내려다 주고 곧장 핸들을 돌렸다.

월요일 아침인 데다 출근 차량으로 고속도로 입구까지 막혔다. 설상가상으로, 타이어에 바람도 빠지기 시작했다. 10시부터 시작인데, 제시간에 못 갈 거 같았다. 휴게소에 있는 주유소에 들러 급한 대로 공기를 채웠다. 천천히 운전해 가까스로 도착했다.

넓은 운동장에는 100m 출전 선수만 보였다. 높이 뛰기 현장을 찾으러 빙 돌았다. 모든 아이들 체격이 내 아이와 비슷했다. 큰 키에, 긴 팔다리에, 군살이라고는 없었다. 전국에서 몰린 선수들, 경기 운영진,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아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0.8 시력이 2.0으로 변했다.

최대한 멀리 앉았다. 아이가 눈에 담기는 위치를 기준으로. 어제까지만 해도 여름이 왔나 했는데, 다시 겨울이다. 반바지 길이 타이즈를 입고, 경기복을 입은 아이. 누가 준건지 패딩을 입고 있었다. 춥겠다고 생각한 찰나, 아이가 패딩을 벗었다. 순번이 되었나 보다. 초반에 뛰는 줄 모르고, 남편은 화장실에 갔다. 그 사이, 아이가 첫 번째 시도를 했다. 연습기량 150cm인데, 130cm을 못 넘었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바로 실격.

남편은 아이가 마지막 뛰는 모습만 봤고,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순식간에 끝난 경기라 연습게임인가 의심했다. 아니었다.

관중석에 있는 코치님이 경기장에 있는 아이에게 짐 가지고 올라오라 했다.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코치님쪽으로 걸어갔다.

"엄마 안 오실 거라고 해서, 못 오시나 했어요."

"오지 말라고 해서요. 저기 숨어서 봤어요."

"그랬군요. 갑자기 날씨도 추워진 데다가, 많이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긴장도가 높은 아이잖아요. 다음 달까지 열심히 훈련하도록 할게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치님께 죄송했다. 학원 스케줄로 매일 훈련에 참석하지 못한 결과니, 굳이 따지자면 우리 쪽에서 미안해했어야 했다. 그보다, 열심히 뛰어준 아이가 실망한 건 아닐까 걱정됐다.

코치님쪽으로 다가오는 아이를 불렀다. 환청인가 싶은지 두리번거리다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웃으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고생했어. 춥지? 담요 가지고 왔는데 이거라도 덮을래?"

"아니, 괜찮아. 코치님이 패딩 주셔서. 근데 왜 왔어?"

"궁금해서 왔지. 많이 긴장했어?"

"응. 발 바꾼 지도 얼마 안 됐고, 폭이 짧아서 자꾸 허리가 걸렸어. 더 연습해야지."

"감기 안 걸리게 옷 따뜻하게 입고. 너 다 끝났다고 너무 장난치지 말고. 다른 친구들은 아직 시합 전이니까. 알겠지?"

경상도 모자 아니랄까 봐 건조한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자리를 떠났다.

돌아오는 차 안, 나도 남편도 우리 때문인가 싶었다. 타이어 펑크는 더 심해졌다. 대구까지 갈 수 없을 거 같았다. 비는 또 어찌나 내리는지. 문경으로 차를 돌려 카센터로 갔다. 급한 대로 조치를 취하고 다시 이동하며 말했다.

"오지마라는데 와서 이렇게 된 거야..."


한 달이 지났다. 전국소년체전은 다음 주에 열리지만, 육상 대회는 이번 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린다.

일주일 전, 코치님이 나이키 신발을 선물해 줬다. 이틀 전, 3월에 우승한 상장을 받았다. 어제는 교무실에서 격려금을 받았다.

학교 대표로 뛴다는 거, 지역 대표로 나간다는 거 자체가 자랑스러우면서도 얼마나 부담될까.

아이는 덤덤한데, 나만 불안한 걸까.

남편이 물었다.

"엄마, 아빠 갈까?"

"아니."

"그럼 아빠만 가면 안돼?"

"응. 안돼."

'근데, 왜 00 선생님한테는 경기 요일, 시간 다 알려줬어? 왜 그 선생님한테는 엄마랑 아빠 일 있어서 못 오실 거라고 했어?'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 달 전, 아이 대회장에 갔다 온 영상을 릴스로 만들어 올렸다. 이제 막 만든 계정에, 게시물이라곤 열 개도 없는데 그 콘텐츠가 소위 말해 '터졌다.' 아직도 알고리즘을 타고 있다. 조금 있으면 8만 조회수가 된다. 대체 누가 이렇게 많이 저장, 공유를 했나 보니 또래들이었다. 이 영상에 공감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건, 내 아이만 그런 게 아니란 증거가 아닐까.


마음 같아선 가고 싶지만, 가지 않기로 했다. 아니, 못 간다. 그날, 둘째 아이 바둑 수업이 있다. 24-25일에 열리는 전국 소년체전 바둑 대회 출전하는 형, 누나들 대국 연습 상대로 오전 10시부터 6시까지 수업에 참여해야 한다. 다행이다. 아무 일 없었으면, 또 거기에 가 있겠지.

내일은 일찍 일어나, 남은 준비물을 챙기고 아침밥도 거하게 차려야겠다. 먹든, 안 먹든 먹고 힘내야 하니까.

선수로 출전하는 마지막 경기인만큼, 온 우주의 기운을 다하고 오길. 앞으로 살아갈 네 날에 큰 힘이 되어줄 경험이라 믿는다.

keyword
화, 금 연재
이전 09화같은 듯 다른, 선물 같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