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들 사이에서 전래동화처럼 내려오는
유머가 있다.
‘방송국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자조적 명언.
실제로 기억을 더듬어보니
눈치 빠른 친구들은 1년 차에 도망가고,
입봉의 기로에 서는 3-4년 차쯤
이탈하는 동료들도 많았다.
그 뒤로는 관성처럼,
혹은 이제 와서 가자니 ‘아까워서’
주저앉는 경우가 대부분.
그러나, 8년 차쯤 되면 방송작가로서
일생일대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그게 바로 ‘결혼’이다.
나처럼 대학에 다니면서
이 세계에 발을 들인 경우가 아니고서는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해
8년 차쯤 되면 30대 초반.
소위 말하는 결혼 적령기가 되기 때문이다.
과년한 딸이 매일 밤을 새우고,
그러다가도 몇 달씩 집에서 쉬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부모가 보기에
복장 터지는 일이다. 인정한다.
더 큰 문제는 내적 갈등이다.
때마침 방송도 지겨워지기 시작할 시기다.
이제 어차피 다 그 나물에 그 밥인데,
또 먹어야 해?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데?
내가 결혼하고 3년쯤 지났을 무렵,
나의 8년 차 동료들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처럼 우르르 청첩장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청첩장이 ‘작별을 고하는 편지’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들보다 먼저, 같은 방식으로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 선배들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며 일상을 공유하고,
주말이면 대소사를 챙기는 평범한 삶과
‘방송쟁이’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것이니까.
‘결혼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을 외치며
기름이 둥둥 뜬 물을 꾸역꾸역 삼켜온 나지만,
누군가에게 쉽게 권할 수 있는 맛은 아니었다.
속이 항상 부대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금방금방 채워졌다.
한 줄의 공고로, 단톡방에서 전달되는 이력서로,
PD가 ‘아는 작가’로.
자신의 모든 시간을
마라톤 회의에 투입할 수 있고,
밤이든 새벽이든 프로그램을 위한
건설적인 대화를 이어갈 수 있고,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같은
변수를 만들지 않는 미혼의 작가들로.
만삭의 몸을 이끌고 회의에 참석하는
‘메인작가’가 더러 있었지만,
독보적인 전투력을 가진 이가 아니고서
불어나는 자신의 무게와
프로그램에 대한 책임이라는 무게를
동시에 지탱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출산 전날까지 대본을 쓰다
병원에 실려 가 아기를 출산했다는
‘레전드 썰’이 가끔 돌았지만,
내게는 ‘레전드 공포’나 마찬가지였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그게 내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육아휴직, 비정규직의 눈물, 저출생 문제,
산재까지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좋은 세상 만들기’에 일조하는
유명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작가들 역시
자신의 머리를 깎는 재능은 없었다.
아니, 재능은 있지만
아무도 그럴 권한을 주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려나....
어쨌든,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고,
특출 난 작가도 아니었던 나는
그렇게 점점 방송국이라는
작고 왜곡된 세계 속에 나를 맞춰갔다.
정작 내가 원하는 삶이 뭔지,
남편이 원하는 삶이 뭔지,
우리가 그리는 미래가 뭔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논하지 않은 채로.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덜컥
‘결혼’이라는 배부터 띄운 나와
그런 내 손을 잡아버린 남편은
단 한 번도 ‘아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번갈아 삼켰다.
무려 10년 동안.
그 말을 뱉는 순간,
우리의 배는 좌초될 것 같았다.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삶이란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