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눈곱을 매단 채
롱패딩만 하나 걸치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뜨거운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나지만,
생일날은 어쩐지 목욕재계 하고 싶은 기분이랄까.
누구의 손끝 하나 닿지 않은
뜨거운 새 물에 몸을 담그는 기분이 퍽 상쾌하다.
두꺼비인지 개구리인지 모를 돌멩이 입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을 받아
연거푸 세수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쌍둥이를 키우면서 나는 자주 고요함을 동경했다.
전생의 나는 ‘광고 없는 감성 재즈 1시간’ 같은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둔 채로 명상도 하고,
청소도 하고, 책도 읽고, 일도 했다.
주기적으로 눈물을 펑펑 쏟을 수 있는 영화를 보며
마음을 씻어내기도 했다.
고요하다는 감각조차 희미해진 지금,
엄마와 나 둘뿐인 새벽의 목욕탕은
낯선 고요를 선물했다.
퍽 마음에 드는 생일 선물이다.
그러나, 달콤한 적막은 단단히 뭉친 어깨가
미처 풀리기도 전에 깨졌다.
내가 가장 불편해하는 방식으로.
한 무리가 들어오는가 싶더니
내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사지탕에서 등에 물줄기를 맞던
엄마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인사드려, 우리 딸.”
“아유 그래? 쌍둥이 키우느라 고생이 많지?”
분명히 초면이지만 보나 마나 내가 어디에 사는지,
뭘 하는지도 다 아는 분들일 것이다.
탕 속 계단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물속으로 완전히 담그면서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엄마와 목욕탕 크루들의 이야기는
어떤 방송보다 흥미로웠다.
명절이 지난 뒤였으므로, ‘네이트판’ 저리가라인
며느리 이야기부터 동네 정육점 흉을 지나
‘아들자식 다 필요 없다’로 귀결됐다.
그렇게 마음에 있는 말을 다 쏟아낸 다음,
한 할머니가 목욕 바구니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아들이 설이라고 사 왔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들자식 다 필요 없다고 하셨던 그 분이다.)
“콘트로인가 콘트라친인가 뭔가 이거 먹으니까, 무릎이 안 아파.”
‘콘트로이친이요.’
속으로 대답했다.
아줌마들은 이내 그 작은 병에 관심을 보였다.
매일, 새벽같이 목욕탕에 오는 이들 중
무릎이 아프지 않은 이가 있던가.
트로트 스타가 ‘선전’해 더 인기를 끌고 있는
그 약병을 나는 애써 외면했다.
보나마나 1병에 3만 원, 2병에 5만 원,
6병에 9만 원 대로 팔았을
그 건강기능식품은 한때
내 통장을 두둑하게 채워줬던 효자 상품이었다.
어딘가 셈이 이상한 가격표처럼
효능이 없진 않겠지만,
과연 그 정도일까 싶은 아리송한
‘보조식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어르신들은 약병에 적힌
의약품이 아니라는 문구보다,
내가 대본에 적은 드라마 같은
기대효과를 더 신뢰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나와
어르신들의 아픈 곳을 긁어준
다음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방송이 거짓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방송작가로 살면서
내가 배운 가장 쓸모 있는 재주는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릴 줄 알고,
큰일을 ‘그까짓 것’으로 만들 줄
알게 된 것이었다.
곰은 재주를 부렸을 뿐이었다.
나의 재주는 우리 엄마도 홀렸다.
친정에 갈 때면 식탁에,
베란다에 가득 쌓여있는
건강기능식품들이 나를 맞았다.
식당에서 무거운 솥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번 돈을
엄마는 작은 병들에 차곡차곡 담았다.
“이런 것 좀 사지 말라니까 엄마! 차라리 병원에 가.”
몸에 좋은 걸 먹기 전에,
몸에 안 좋은 걸 덜 먹는 건 어떠냐고
잔소리하면 엄마는 눈을 흘겼다.
곶감을 줘서 먹고 나면,
혈당을 낮춰준다는 진액을 가져와
내미는 식이었다.
입이 떡 벌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게 엄마는 말했다.
“늙어서 아프면 자식들 고생시키는 거야.
엄마가 알아서 해.”
머리가 띵했다.
건강기능식품을 기꺼이 사 준 이들은
나의 재주에 속은 것이 아니라,
알고도 기꺼이 ‘속아준’ 것이었구나.
매일 새벽 목욕탕에서 아픈 몸을 지지고,
건강기능식품에 쌈짓돈을 바치는 이들에게는
불로장생의 꿈이 없다.
딸들이 유독 내게 매달리던 어느 날,
엄마의 서랍 속에 차곡차곡 채워져 있는
정체 모를 약 중에서 ‘활력’이라고 적힌
파우치 하나를 집었다.
과연 묘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