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을 달리는 이유

by 롸잇테리언

PART 1. 기획회의

⑨ 기울어진 운동장을 달리는 이유






“때깔이 다르잖아, 벌써.”


한참 자리를 비웠던 PD가

신인 아이돌 앨범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대형 신인이라는 수식어로

연예 뉴스를 뒤덮은 이들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앨범은 과연 눈에 띄었다.

봐야 할 것이 많아 오히려 눈 둘 곳 없는

극강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연애편지를 쓰듯, 한 페이지를 꽉 채워 돌려쓴

인사말을 빠르게 훑고 화보,

아니, 앨범을 살펴봤다.


‘이 중에, 네 취향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멤버들의 얼굴을 보니,

회사의 자신감은 분명 납득가는

부분이 있었다.


집에 둘 곳도 없다면서 더 이상

CD를 집이 아닌 회의실에 보관하는 PD도

그 CD만은 다시 돌려받아 가방에 넣었다.


웬일이냐 싶은 눈빛을 읽었는지,

PD가 머쓱하게 덧붙였다.


“혹시 모르잖아. 얘네도 BTS처럼 될지.

노래도 돈 좀 썼던데?”


이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갔다고,

‘방송쟁이’들은 말했다.

동의하는 바였다.


3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가진 모든 끼를

다 뿜어내야만 하는 아이돌의 세계는

치밀하게 계산된 시스템 안에서

빛을 발했다.


어떤 노래에 어떤 안무를 얹을지부터,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외모를 빛내 줄

의상과 메이크업,

예능감과 다국어 트레이닝까지.

그러기 위해서는 감 좋은 작곡가와

뛰어난 선생님이 필요했고,

그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회사란 정해져 있었다.


당시 내가 담당하는 프로그램은

무대 위가 아닌 곳에서의

매력을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당사자들에겐 까다로웠고,

팬들에겐 기다려지는 일정이었다.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는 가수들은

때론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불편하지만

반짝이는 옷을 입은 채로,

발끝에 집중하며 구름 위를

아슬아슬 걸었다.


각 프로그램의 이름표가 달린

‘구름들’은 언제나

그들의 ‘컴백’ 소식에 맞춰

분주하게 줄을 섰다.

나 역시 누가 봐도 주인공인 이들 뒤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아이돌 프로그램 작가였던 나는

아이 둘 엄마가 됐다.


혹시나 싶어 달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인 그룹의 이름을 익히다,

그마저도 완전히 놓아버린 어느 날.

우연히 미용실에 켜져 있는 TV 화면에서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희미해져 가는 빛을 건져 올린 얼굴로,

조금 더 절박해진 몸짓으로

그들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얘네가 괜찮다고? 하여간 특이해.”


맞다.

그 아이에게선 확실히 ‘돈 냄새’가 안 났다.


다른 그룹이 일정을 ‘펑크’내는 바람에

급하게 섭외된 터였다.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이 소원이었다며,

메이크업이 다 지워질 정도로

애썼던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껏 공들여 쓴 자막뿐이었다.


이 별도 별이라는 것을,

세상이 알아주길 바랐다.


누군가에게는 발에 채는 기회가

어떤 이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졌지만,

내가 속한 세상에서 그런 상념은 사치였다.

묘한 동질감은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함께

금세 찌그러졌다.


미용실에서 우연히 마주한 얼굴은

끝내 검색창에 다시 그 이름을 쳐보게 했다.


스크롤을 내리면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간절히 바라던 재데뷔가 좌절된 모양이었다.


눈물범벅이 된 채로, 포기하지 않겠다며

끝내 웃어 보이는 영상을 보다,

소름 돋은 팔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건 분명, 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어쩌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겠구나.

(실제로 이 친구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열심히 거슬러 오르는

많은 이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불신한다.


어차피 세상에는 답지가 있으니,

헛된 꿈 꾸지 말라는 듯이.


하지만, 이건 함정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바닥을 찍고 올라올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역경이 있듯이,

모든 주인공에게는 눈물 젖은 서사가 있다.


큰 손이 만들어 준 세계관 말고,

내 발자국이 찍힌 무수한 이야기.


진짜 주인공은 오늘도 끝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달리고 있는

얼굴들 속에 있다.



조용히 그들의 때가 오기를

기도해본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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