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깔이 다르잖아, 벌써.”
한참 자리를 비웠던 PD가
신인 아이돌 앨범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대형 신인이라는 수식어로
연예 뉴스를 뒤덮은 이들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앨범은 과연 눈에 띄었다.
봐야 할 것이 많아 오히려 눈 둘 곳 없는
극강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연애편지를 쓰듯, 한 페이지를 꽉 채워 돌려쓴
인사말을 빠르게 훑고 화보,
아니, 앨범을 살펴봤다.
‘이 중에, 네 취향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멤버들의 얼굴을 보니,
회사의 자신감은 분명 납득가는
부분이 있었다.
집에 둘 곳도 없다면서 더 이상
CD를 집이 아닌 회의실에 보관하는 PD도
그 CD만은 다시 돌려받아 가방에 넣었다.
웬일이냐 싶은 눈빛을 읽었는지,
PD가 머쓱하게 덧붙였다.
“혹시 모르잖아. 얘네도 BTS처럼 될지.
노래도 돈 좀 썼던데?”
이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갔다고,
‘방송쟁이’들은 말했다.
동의하는 바였다.
3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가진 모든 끼를
다 뿜어내야만 하는 아이돌의 세계는
치밀하게 계산된 시스템 안에서
빛을 발했다.
어떤 노래에 어떤 안무를 얹을지부터,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외모를 빛내 줄
의상과 메이크업,
예능감과 다국어 트레이닝까지.
그러기 위해서는 감 좋은 작곡가와
뛰어난 선생님이 필요했고,
그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회사란 정해져 있었다.
당시 내가 담당하는 프로그램은
무대 위가 아닌 곳에서의
매력을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당사자들에겐 까다로웠고,
팬들에겐 기다려지는 일정이었다.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는 가수들은
때론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불편하지만
반짝이는 옷을 입은 채로,
발끝에 집중하며 구름 위를
아슬아슬 걸었다.
각 프로그램의 이름표가 달린
‘구름들’은 언제나
그들의 ‘컴백’ 소식에 맞춰
분주하게 줄을 섰다.
나 역시 누가 봐도 주인공인 이들 뒤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아이돌 프로그램 작가였던 나는
아이 둘 엄마가 됐다.
혹시나 싶어 달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인 그룹의 이름을 익히다,
그마저도 완전히 놓아버린 어느 날.
우연히 미용실에 켜져 있는 TV 화면에서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희미해져 가는 빛을 건져 올린 얼굴로,
조금 더 절박해진 몸짓으로
그들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얘네가 괜찮다고? 하여간 특이해.”
맞다.
그 아이에게선 확실히 ‘돈 냄새’가 안 났다.
다른 그룹이 일정을 ‘펑크’내는 바람에
급하게 섭외된 터였다.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이 소원이었다며,
메이크업이 다 지워질 정도로
애썼던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껏 공들여 쓴 자막뿐이었다.
이 별도 별이라는 것을,
세상이 알아주길 바랐다.
누군가에게는 발에 채는 기회가
어떤 이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졌지만,
내가 속한 세상에서 그런 상념은 사치였다.
묘한 동질감은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함께
금세 찌그러졌다.
미용실에서 우연히 마주한 얼굴은
끝내 검색창에 다시 그 이름을 쳐보게 했다.
스크롤을 내리면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간절히 바라던 재데뷔가 좌절된 모양이었다.
눈물범벅이 된 채로, 포기하지 않겠다며
끝내 웃어 보이는 영상을 보다,
소름 돋은 팔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건 분명, 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어쩌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겠구나.
(실제로 이 친구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열심히 거슬러 오르는
많은 이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불신한다.
어차피 세상에는 답지가 있으니,
헛된 꿈 꾸지 말라는 듯이.
하지만, 이건 함정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바닥을 찍고 올라올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역경이 있듯이,
모든 주인공에게는 눈물 젖은 서사가 있다.
큰 손이 만들어 준 세계관 말고,
내 발자국이 찍힌 무수한 이야기.
진짜 주인공은 오늘도 끝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달리고 있는
얼굴들 속에 있다.
조용히 그들의 때가 오기를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