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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열심히 사는데 왜 자꾸 멍해질까

내 마음에 '새로고침'이 필요할 때(1)

by 공감디렉터J


오후 3시의 사무실은 묘한 정적과 소음이 공존합니다.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 누군가의 건조한 기침 소리, 그리고 윙윙 돌아가는 공기청정기 소리.

그 백색소음 속에서 저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습니다. 화면 속 커서는 1초에 한 번씩 깜빡거리는데, 제 머릿속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멈춰버린 것 같습니다.

분명 해야 할 일 리스트는 포스트잇에 빼곡한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방금 전 팀장님이 메신저로 지시한 내용이 뭐였더라? 채팅창을 다시 올려봅니다. 문장을 읽고는 있는데, 내용이 머리에 입력되지 않고 튕겨져 나가는 기분. 커피를 세 잔째 들이켜도 깨지 않는 이 몽롱함.

혹시 당신도 지금, 이런 상태인가요?


저는 한때 제가 게을러진 줄 알았습니다. 혹은 나이가 들어 총기가 떨어진 건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죠.

그런데 임상심리학자 질 웨버(Jill Weber) 박사의 책을 읽다가 무릎을 탁 쳤습니다. 이 답답한 증상에 이름이 있더군요. 바로 '브레인 포그(Brain Fog)', 말 그대로 뇌에 안개가 낀 상태입니다.


"당신은 무능한 게 아니라, 너무 많은 탭을 열어둔 겁니다."

질 웨버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브레인 포그는 의학적인 질병이나 치매가 아닙니다. 너무 큰 책임감과 헌신이 머릿속에 누적되어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다 보니 뇌가 지쳐버린 상태죠."


위로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했습니다. 우리가 멍해지는 이유는 일을 안 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너무 잘하려고 애쓰다가 방전되었기 때문이라니요. 웨버 박사는 자신의 환자들 상당수가 "상당히 유능하고 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안개 속을 헤매듯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것이죠.

마치 인터넷 브라우저에 탭을 50개쯤 띄워놓은 노트북과 같습니다. 당장 보는 페이지는 하나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뒷면에서 수십 개의 탭이 데이터를 잡아먹으며 시스템을 느리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 뇌도 과부하가 걸린 겁니다.


퇴근하지 못하는 뇌, 연결의 역설

도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 되었을까요?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의 전문의는 시대의 변화를 지적합니다. 과거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던 시절에는 몸이 힘들었습니다. 퇴근하면 적어도 일 생각은 멈출 수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머리와 아이디어로 싸우는 시대입니다. 게다가 스마트폰과 메신저 덕분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어 있죠. 물리적인 퇴근은 했지만, 뇌는 퇴근하지 못한 겁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침대에 누워서도 슬랙(Slack) 알림을 확인하고, 주말에도 이메일을 체크합니다.

질 웨버 박사는 "30년 전만 해도 일과 삶의 경계가 명확했지만, 지금은 그 경계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쉬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뇌는 여전히 '대기 모드' 상태로 긴장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이라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몸은 회사에 출근해(Present) 의자에 앉아 있지만, 영혼은 집에 있는 상태.

업무 효율은 20~30%로 뚝 떨어지고, 그저 시간만 흘려보내는 멍한 상태 말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결근하는 것보다, 출근해서 멍하니 있는 프리젠티즘이 기업 입장에선 더 큰 손실일 수 있다"고 경고하더군요. 하지만 기업의 손실보다 더 아픈 건, '내가 밥값도 못 하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아닐까요?


감정의 쓰레기통이 넘쳐흐를 때

일만 힘들면 차라리 낫겠습니다. 직장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역시 '사람'입니다.

전문의와의 인터뷰 중 가장 공감 갔던 부분은 "현대 직장인은 혼자 묵묵히 일해서는 성과를 낼 수 없고, 수많은 사람과 복잡하게 얽혀야만 한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아이디어 하나를 내도 상사 눈치 보랴, 동료와 조율하랴, 거래처 비위 맞추랴...

우리의 '감정 쓰레기통'은 매일매일 꽉 찹니다. 그런데 이 쓰레기통을 비울 시간도 없이 또 다른 스트레스를 꾹꾹 눌러 담으니, 결국 뚜껑이 열리거나 냄새가 진동할 수밖에요.

질 웨버 박사는 우리에게 뼈아픈 조언을 건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승진만 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회피합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면, 결국 10점 만점의 스트레스 척도에서 10점을 찍고 폭발하게 됩니다."


이제, 탭을 하나씩 닫아야 할 시간

글을 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회사를 관두라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전문가들은 거창한 해결책보다 '인정'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내가 지금 힘들다는 것, 내 머릿속에 안개가 끼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웨버 박사는 "자책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당신이 못나서가 아니라, 그동안 너무 열심히 달렸기 때문에 뇌가 파업을 선언한 것뿐이니까요.


오늘 밤엔 자기 전, 스마트폰을 거실에 두고 침실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요?

웨버 박사가 추천한 '자신을 위한 의식'처럼,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뇌에게 "이제 일 안 해도 돼, 쉬어도 돼"라고 신호를 보내주는 겁니다.

물론,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벅찰 때가 있습니다. 병원에 가기는 무섭고, 상담 센터는 비싸고, 친구에게 털어놓기엔 자존심 상할 때. 다행히도 요즘은 기술이 우리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병원 문턱을 넘지 않고도, 내 방 침대 위에서 마음을 돌볼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안개 속을 걷는 당신,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조금만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이 안개를 걷어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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