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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력 Oct 20. 2024

잊히면 안 되는 이름 - 8화

"우리는 누군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이름을 가지고 있다. “

애어른     

1학년 아이들은 대체로 만 8세 전후에 입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생계나 집안 사정에 따라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아이들이 함께 입학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1학년 학급에는 정숙이처럼 예외인 경우를 빼고 만 8세부터 10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섞여 있었다. 그 아이들이 무거운 군화로 다져지고 다져져서 2학년이 될 즈음에는 사태파악이 너무도 정확히 되는 애어른들이 되어 있었다. 도요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확고한 공공의 적이었다. 도요다가 겨우 어린애들을 상대로 오만하게 자국의 온갖 범죄를 합리화시키고 있는가 하면, 키세키는 자신이 아이들 사이에 소외된 아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 대장인 줄 알고 설쳐대고 있다. 누구도 그 두 사람에게 목소리를 내어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하였으나, 우리들의 눈에 이들의 행보는 정말 가관이었다.     


어른이 되면 모두 혼내주리라!          


그렇게 특별한 변화 없이 지배자에 대한 증오와 억울함만이 차곡차곡 쌓여갈 즈음, 중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자신의 목숨을 끊었고 했다. 이어 5월 8일에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유럽의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단다. 


아버지는 마을의 이런저런 업무상 가깝게 지내던 일본인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집에서 할머니와 엄마에게 근황을 하나하나 전해 주었다.


그러더니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이럴 때일수록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평소대로 조용히 생활하라고 식구들에게 당부했다.   

   

원자폭탄의 위력에 일본은 8월 15일 항복 선언을 하였고 그동안 조선에서 권력을 누렸던 입장에서, 갑작스러운 패전과 함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혼란에 빠진 그들은 일본 본국으로의 귀환을 희망했지만, 즉시 떠날 수는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어린애들 앞에서 그렇게도 당당했던 도요다선생은 더 이상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보복 행위를 벌이는 일도 있었고,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뭉치거나 미군정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 조선에서의 특권을 잃었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이 처벌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압도된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보복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숨어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마을엔 일본인들이 한꺼번에 떠나거나 숨어들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일본 관리들이 나고야, 후쿠오카 같은 본국 도시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고도 했고, 일부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올 생각을 않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아이들은 이 변화가 무섭고도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지만, 어른들의 말은 그저 귀에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학교에서 선생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오랜만에 긴장이 풀린 듯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교실은 조용했고, 동수와 정숙이는 교실 구석에 모여서 벽에 붙은 일본어 포스터를 떼어냈다. “더 이상 이걸 볼 필요가 없어,” 동수가 말하며 포스터를 구겨버렸다. 그때까지도 도요다 선생이 돌아올까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불안감은 사라지고 아이들 사이에 어색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나는 이러한 변화가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만 같아 한동안은 자다가도 몇 번을 깨어 정신을 가다듬어 보곤 했다.


마을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은 대개 이사 준비에 몰두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 생필품을 챙기는 데 분주했다. 한때 거리를 활보하며 소리 높여 조선인을 질책하던 일본 순사들 역시 모습을 감추었다.      


이웃집 사요코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본국으로 떠나기 전 늦은 밤 엄마 아버지를 찾아와 절을 하였다. 이웃으로 지낼 수 있어서 감사했고 당당하지 못한 본국의 혜택을 입고 살면서 부끄러움을 몰랐기에 정말 미안했다고 했다.     

잠결에 그들의 말소리를 정숙이와 나는 차가운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말 한마디면 끝나는 건가?’     


하긴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데도 한 마디 말로라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얼렁뚱땅 정당화하려는 그들의 본국보다는 사요코네가 훨씬 나은 셈이다. 내가 죽은 1989년 바로 이 순간에도 그들은 변한 게 없으니까.     


그간 조선 내 일본인의 수는 대략 70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관리, 군인, 상인, 교사 등 다양한 직업군에 속해 있었다. 여하튼 그들은 미군정의 관리 아래 점차 1946년 말까지 일본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8월 15일!! 믿기지 않는 이 상황이 가슴 부풀게 하는 무엇으로 하여금 어린 우리들을 울컥하게 했다. 기쁜데 눈물이 나왔다. 태극기를 만들어 밖으로 쏟아져 나와 흔드는 이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모두 우리 할머니, 엄마, 아버지, 내 동생들, 언니 오빠 같이 느껴졌다. 벙어리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대한 독립 만세!", "조선 해방 만세!", "자유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엄마도 모두 아이들 같았다. 우리 집 어른들이 이렇게 허술해 보인 적은 처음이다.


이 사람들 속에 키세키도 있을까?  이름만으로도 정말 분위기 깨는 존재다. 키세키, 너는 이제 누구로 살아갈 거니?  

  

어린아이 같지 않은 온갖 기억과 생각들이 나를 아뜩하게 만들었다. 


35년간의 억압을 떨친 이 감격적인 독립을 기념하는 자발적인 만세운동은 서울, 평양, 부산 등 주요 도시에서 일어났고.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자유와 독립을 외쳤다. 그날부터 이어진 며칠간, 조선 곳곳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독립을 기념하는 집회와 행진이 계속되었다. 특히 1945년 8월 16일부터는 전국적으로 더 조직적이면서 규모가 큰 만세운동과 해방 기념행사가 이어졌다.


우리 마을에서도 몇 날 며칠간 어른들은 이제는 자유라고 외치며 서로를 껴안았고, 아이들까지도 그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 모두의 눈과 귀, 그리고 두 손은 이 독립의 함성과 벅찬 감격을 고스란히 기억할 것이었다. 동수와 정숙이도 태극기를 흔들며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었고, 나는 한순간이었지만 그들의 어린 얼굴에 맺힌 웃음을 보며 마음 깊이 안도했다.


몇 년간 아버지가 고이 모셔둔 태극기를 꺼내어 거리에 내걸었다. 그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우리 조상들이 자유와 독립을 꿈꾸며 희생한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마을 어귀에서 흙길을 따라 걷던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모여들어 손에 손을 잡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함성은 마치 수십 년간 묻혀 있던 목소리들이 되살아난 듯, 온 마을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내 옆에서 목소리가 떨리는 할머니는 “이게 꿈은 아니겠지?”라고 혼잣말을 하며 다시 한번 태극기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굳은 얼굴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이 마치 그동안 억누른 세월과 기억들이 한순간에 떠오른 것만 같아 함께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 이 순간,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기쁨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그날 밤도 사람들은 마을 곳곳에 모여 조용히 촛불을 밝히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그날의 함성을 이어갔다. 이제 우리는 자유를 되찾았고, 우리 손으로 우리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나는 내 두 눈으로 이 장면을 본 것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곧 다가올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슴이 아려왔다. 아, 모든 것이 순탄했으면 좋으련만! 역사는 인간의 주체하지 못하는 욕망으로 인해 불가불 피를 흘려야 하는 것으로 그 운명이 정해진 것이냐? 나는 몸서리가 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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