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30분 껄로의 산속에 있는 티토 하우스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싱그럽고 상쾌하며 평화롭다.
나이 든 관리인은 이슬 맺힌 정원에 떨어진 낙과를 줍고 빗질로 정원을 쓸고, 깔끔하게 머리를 질끈 묶은 여직원은 주방에서 조식 준비에 여념이 없다. 티토하우스의 미스터 티토는 식당을 정리하고 커피를 내리고 음악을 틀고 아침 일찍 일어난 손님들에게 굿모닝 인사를 건네는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티토 하우스의 아침
그때 마침 등장하는 좀비 같은 몰골의 아시아인 여자, 배낭 두 개를 앞뒤로 짊어지고 인사하다 배낭의 무게에 꼬꾸라질 듯이 비틀비틀 아슬아슬하게 들어와 자신을 오늘 예약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사람, 그런 나를 본 티토 아저씨의 표정은 짐짓 당황스러움이 역력했고 고심하는 표정 또한 역력했다. 아직 체크인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방이 비워지지 않은 상태, 식당엔 조식을 먹기 위해 곧 투숙객들이 몰려들 텐데.. 이른 아침 좀비처럼 등장한 이 투숙객을 어찌하면 좋을지...
"지금 체크인이 안돼요. 우선 이 테이블에 앉아 있어요."
티토 아저씨의 말씀대로 문 밖 테이블에 나를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그렇게 잠시 머리를 괴고 눈을 감자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국숫집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택시라도 불러 탔어야 했는데 이 짐을 다 짊어지고 산길을 오른 무모함의 대가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한 10분쯤 엎드려 있었을까? 티토 아저씨께서 가지고 나오신 숙박 기록부? 같은걸 작성하고서 고개를 돌려보니 들어올 때 보이던 숙소의 후광이었을지도 모를 아침 햇살이 티토 하우스의 숲 속 정원을 비춰주고 있었다. 보이는 건 소박하지만 멋이 있는 잘 가꾸어진 정원과 들리는 것이라곤 산새들이 지저귐과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들, 부엌에선 맛있는 토스트 굽는 냄새까지 코끝을 깨워댔다
관리인 아저씨가 낙과를 주우며 시작하는 아침, 이 영상과 소리를 좋아한다.
트레킹 말곤 할 것도 없는 '진짜' 노잼 지역이라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던 껄로 였다. 그래서 여행 경로에 껄로를 넣느냐 마느냐로 꽤 여러 날을 고민하기도 했었고 결국 미얀마 비행기에 오르던 순간까지도 결정 내리지 못했던 코스였는데 그러다 결국 결정해 버린 껄로행의 시작이 새벽에 길바닥에 떨궈지고 숙소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행길인 건가 싶어 분명 30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껄로행을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생 끝에 낙원에 온 것일까? 티토 하우스는 껄로가 내게 주는 보상 같은 곳인 걸까?
좀 전까지 분명 바닥에 눕는 순간 바닥에 녹아내려 접착해버릴 것 같았는데 갑자기 어디서 기운이 솟아난 걸까? 티토 하우스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분주해졌다. 티토하우스의 새벽을 지금 이 순간 담아내지 못한다면 잠 조금 못 잔 것보다 몇 배는 후회할 것만 같았다. 사진에 담는 것도 모자라 고프로까지 꺼내 들어 영상에도 기록했다. 작고 가벼워 별 문제는 안됐으나 더운 날씨에 굳이 이걸 왜 가지고 왔나 싶었던 짐짝 같던 고프로였는데 이 순간을 위해 양곤에서부터 바간까지 내 고프로는 가방 속에서 잠들어 있었나 보다.
무엇하나 수선스럽고 분주함이 없었다. 누구 하나 뛰는 이 없었고 큰소리를 내는 이도 없었다. 투숙객들이 하나둘씩 내려와 조식 타임을 가질 때에도 모두 티토 하우스에 어울리는 사람들뿐인 건지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사실 미얀마는 참 혼자 여행하기 좋은 나라라고 나는 느꼈었다. 왜냐하면 혼자 여행 온 사람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간 숙소들이 게스트 하우스여서인지 아니면 성수기 바로 직전이어서 유럽 휴가철이 아니라 그런지 몰라도 내가 만나는 많은 여행자들이 대다수 나 홀로 여행족이었기에 커플, 친구, 가족 여행 단위 속에 둘러 쌓여 느끼는 외로움 같은 건 의외로 별로 느낄 수 없었다. 단,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여행 온 사람이 많아서일까? 이제까지 다른 나라 여행지에서 만났던 여행자들보다는 조금 차갑고 곁을 안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여행지에서 밥 먹듯이 주고받던 hi, hello도 무시당하길 몇 번, 눈 마주치면 미소 짓는 의례 하던 행동도 미얀마 여행 중엔 없는 날들이 많았다.
이렇게 많은 외국사람들과 섞여 있어 볼 일이 별로 없던 나의 짧은 지식과 경험만으론 왜 내가 외면받는지 알 수가 없었고 점점 그들 앞에 위축되고 긴장되어 갔다. 특히 그 정점은 바간 숙소에서였는데 아침마다 건네던 인사를 옆방 독일 남자 이외엔 모조리 무시당한 뒤로 약간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티토 아저씨의 안내로 식당 안 구석에 다시 자리를 잡은 나에게 들어오는 투숙객마다 미소와 함께 아침 인사를 먼저 건네 왔다. 늘 하는 그들의 인사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나 또한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굿모닝~!"
티토하우스 식당 벽에 자리 잡고 있는 파란 1000짜리 지폐
8시가 넘어서고 멍하니 식당 구석에 앉아있는 내게 티토 아저씨가 다가오셨다.
"예약한 방이 비었어요. 그런데 청소 때문에 9시가 넘어야 들어갈 수 있어요."
"네:)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기다리기 힘들다면 오늘 시장에 5일 장이 있어요."
"5일장이요?"
"네, 짐은 우리가 방에 갖다 놓을게요."
"아... 아니에요.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그냥 기다릴게요"
"알겠어요"
아까 오르락내리락한 산길을 다시 내려갔다 올라올 생각을 하자니 아찔한 기분이 들어 아저씨의 제안은 거절했다. 그런데 5일장이라... 그냥 시장도 아니고 5일장이라... 시장 마니아를 자극하는 단어였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경험이 있기 때문에 5일장과 일반 시장의 묘한 다른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5일장이란 단어를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좁은 버스 의자에서 자다 깨다 하며 잔 게 전부에 새벽이슬 맞고 산길을 올라온 탓에 체력이 정말 바닥인데... 근데 5일장이란 말이지...
티토 아저씨는 벨기에분으로 여행 오셨다가 껼로가 너무 좋아 터를 잡으셨다고 한다.
티토 아저씨의 5일장 소리에 멍하게 있던 내 정신이 깊은 고민으로 또르르르르하고 굴러가기 시작했다. 만약 일정대로 내가 내일 트레킹을 떠나게 된다면 껄로에 있을 수 있는 날은 오늘뿐이다. 근데 이틀을 머무른다 해도 5일장은 오늘 말곤 볼 수 없다. 그럼 체력은? 걷다 보면 걸어지겠지... 힘들면 택시 타지 뭐!
결국 5일장 승!
어쩌면 너무 결론은 이미 나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르는 캐비어 맛보다 아는 떡볶이 맛이 더 참을 수 없듯이 5일장의 생동감과 재미를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바간 시장에서 너무 실망이 컸기 때문에 남은 체력을 쥐어짜서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티토하우스 내 숙소 방
티토 아저씨께 5일장을 다녀오기로 생각을 바꿨다고 말씀드리고 가방을 부탁드리며 홀가분한 몸으로 숙소를 나섰다. 잠깐, 몸이 왜 이렇게 가볍고 팔랑팔랑 하지? 숙소에 들어가기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바닥에 녹아내릴듯했는데 두 시간 만에 어디서, 무슨 에너지가 솟아난 건지 가뿐해진 컨디션으로 완충되어 있었다. 티토 하우스는 설마? 치유의 능력이 있는 걸까?